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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2. 국외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한 오영선·부인 이의순

배재학당서 신학문 배우며 국제 정세에 관심
강제 병합 후 이동휘와 북간도 이주해 日에 맞서
임시정부서 활약…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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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의정원 기념사진(1919)

오영선은 6품 중추원 의관 주임관을 지낸 오평묵과 고씨 부인의 장남으로 1886년 4월13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다. 호는 기윤, 다른 이름은 윤길로 알려졌다. 별호로 석농을 사용하기도 했다. 형제로 재선과 필선 두 동생이 있었다. 재선은 교사로서 민족교육에 힘쓰다가 일경의 고문으로 병고에 시달리며 요절했다. 필선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지였다.

오영선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국제정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3년 정도 근무한 개성 보창학교는 이건혁ㆍ임규영ㆍ박우현ㆍ손의문ㆍ최문현 등 유지신사들이 경비를 지원해 재학생이 백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발전했다.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안타깝게 구국 간성이 되려는 군인의 길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영선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물리학교에 입학했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돼 퇴학 처분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이 함북 성진군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이러한 인연은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계봉우ㆍ김하석ㆍ정창빈 등과 이른바 ‘이동휘 교육생’이 됐다.

대한적십자회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오영선은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이동휘와 함께 북간도로 이주했다. 광성학교 교사로서의 활동은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인재 양성과 맞물려 있었다. 동녕현 나자구에 동림무관학교 설립은 장차 일어날 독립전쟁에 대비하려는 일환이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곳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돼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했다.

이즈음 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오영선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독립운동에 관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동지들에게 지금까지 구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7가지 각오를 밝혔다. 첫째는 공과 사의 구분, 둘째는 책임감, 셋째는 개인 욕망의 억제, 넷째는 감정이 아닌 이성, 다섯째는 동지의 결점과 단점을 지적하지 않기, 여섯째는 경거망동 금지, 마지막으로 동지를 선의로 대하는 것 등이었다. 즉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 다 동지다”라며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에 앞장섰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에선 법무총장으로 선출돼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했다. 이듬해 박은식이 사망하자 장례위원으로 빈소를 지키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정의, 신민, 참의 3부를 설득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합의를 이끌어냈다.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 이동녕 체제에서는 의무장과 군무장에 각각 임명돼 민족유일당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중국 정세 변화로 이 운동은 1929년 10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해산을 선언함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외에 임시정부 외곽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대한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으로 교민 자제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기준비위원회에 임원도 맡았다. 이밖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해 안공근 등과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계속적으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1939년 3월10일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정부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오영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가족 사진(1926년 가울 상하이)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 이의순

이의순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버지 이동휘와 어머니 강정혜 사이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할아버지는 단천군 통인을 지낸 이승교(일명 이발)로 서북학회 회원과 연해주지역 노인동맹단원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보창학교를 중심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 초기에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이끈 선각자다.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한 후에는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등 한인 자녀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독립운동사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언니 이인순은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지원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1월께,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를 도와 독립의 선봉장을 자임한 신여성이 열악한 환경으로 27세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숨진 이후 아들 정광우마저 5세의 어린 나이로 역시 장티푸스로 숨졌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남편 정창빈은 이듬해에 1월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안타까워한 동포사회는 1920년 1월17일 오후 2시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이인순과 김란사(일명 하란사)ㆍ김경희 등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때 내빈으로 참석한 안창호ㆍ김립ㆍ윤현진 등 30여명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이인순의 추도식을 상하이에서 개최할 정도로 이름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가족 사진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여권 신장에 노력하다

아버지가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하자 이의순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했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일찍이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일제 강점 이후 가족을 따라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국자가에 정착했다. 지린성 허륭현 명동촌에 있는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명동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의순은 교사로서 정신태ㆍ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인근 마을에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도 개최하는 등 한인 여성들 자부심을 일깨웠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선 신한촌 삼일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3ㆍ1운동 이후 국치기념일에 즈음해 이 행사를 부부가 주관했다. 이의순은 “우리는 여자라고 하지만 대한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상 어찌 안이하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며 여성도 남성과 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호소했다.

오영선 사진

그는 채성하의 장녀 채계복과 함께 상하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은 남성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 나아가 여권을 신장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의 양성을 위해 적십자회를 조직에도 분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오영선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에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의순은 1930년 8월11일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하이 한인부인회를 개조해 급진적인 상하이 한인여성동맹 조직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인사회 여성운동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상하이 여자청년회를 조직하려는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동포들 대동단결과 화합, 민족의식 고취와 여권 신장에 혼신을 다한 오영선-이의순 부부의 항일여정이 아련히 떠오른다.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의 독립운동과 함께 한 이들의 인생항로는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온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국가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