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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1.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론가 조소앙·부인 오영선

상하이 망명 후 임시정부 수립 강조...박달학원 창립 해외청년 교육도 힘써
민족유일당운동 전개 ‘삼균제도’ 집필....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계획 적극 제시
오영선, 가족 독립운동 뒷바라지 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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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유학 경험… 세계사적 안목 기르는데 도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성균관을 그만 두고 방황할 무렵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유학생을 선발했다. 조소앙은 이 소식을 듣고 응시해 합격했다. 일행 50명은 도쿄부립제1중학에 입학해 일본식 중등교육을 받았다. 엄격한 규율과 통제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유학생 40% 정도는 중도에 그만 뒀다. 더욱이 을사늑약에 격분한 유학생들은 우에노 공원에서 을사오적 등의 매국행위를 성토했다.

소앙은 유학생 친목단체인 공수학회를 조직하고 학보의 주필로 활동하는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해 단연동맹에 동참했다. 부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세이소쿠 영어학원에서 어학을 공부한 후 1908년 3월에는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프랑스 법학의 영향을 받아 국권주의를 비판하는 민권주의적 법학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재학 중 대한흥학회 기관지인 <대한흥학회보> 주필을 맡는 한편 여러 잡지에 자신의 경험담 등을 투고했다. 강제병합 때에는 ‘한일합병성토문’을 전달하고 비상대회를 소집하려던 것이 발각돼 연금당했다. 1912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경신학교ㆍ양정의숙ㆍ대동법률전문학교 등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 상하이 망명 후 한민족 대동단결 도모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독립

운동가 조소앙 등이 제출한 독

립요구서. 연합뉴스

이듬해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신규식ㆍ박은식ㆍ신채호 등은 중국 혁명인사 등과 동제사를 개조한 신아동제사를 조직했다. 소앙은 이에 가담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창립하고 해외 청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국내외 동포의 대동단결을 유도하기 위해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육성교를 제창했다. 이어 국내외 동포에게 대동단결선언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강조했다.

만국평화회의에 출석할 준비로 주권불멸론, 주권민유론,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해 이를 스웨덴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조선문제를 의제로 제출, 통과시켰다. 1918년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부주석에 선출됐다. 이듬해 2월에는 만주 지린성에서 김교헌ㆍ김동삼ㆍ황상규ㆍ박찬익 등 39명과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국내 3ㆍ1운동 소식을 접하고 <대한독립선언서> 4천부를 인쇄해 각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단체에 보냈다.

■ 삼균주의를 <대한민국건국강령>으로 내세우다

나경석으로부터 국내 3ㆍ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조소앙은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서 활동무대를 상하이로 옮겼다.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민주권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헌장기초위원, 심사위원, 임시의정원법기초위원, 초대 국무원비서장,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어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사회당대회 등에 임시정부대표로 참가하면서 유럽을 시찰한 뒤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해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문인 <만주리선언>을 발표했다.

이듬해엔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출됐다. 한편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타격을 입은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제3차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로 전환을 도모했다. 임시정부의 헌법개정을 반대하고 내부분열을 수습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소앙은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중 <삼균제도>를 집필해 삼균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1927년에는 김구ㆍ안창호ㆍ이시영ㆍ김두봉 등과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창립하고 상임위원에 선출됐다. 이어 민족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이와 함께 동생 용주를 귀국시켜 삼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삼평사를 조직하고 잡지 <평론>을 간행했다.

민족혁명당이 조직되자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신당창립대표위원으로 참석, 김규식ㆍ김원봉과 함께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됐다. 민족혁명당은 당의와 당강을 통해 8ㆍ15해방 후의 민족국가 건설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 삼균주의 이론이 반영돼 정치ㆍ경제ㆍ교육의 평등을 제시했다. 재건한 한국독립당은 명백하게 삼균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표방했다.

중일전쟁 발발에 즈음해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은 한국국민당ㆍ조선혁명당ㆍ한인애국단과 미주 5단체 등과 통합,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조직됐다. 정강에는 삼균주의를 그대로 반영했다. 1941년 임시정부의 외무부장 겸 선전위원회 주임위원으로서 삼균주의 원칙에 입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기초했다. 이후 1943년 4월에는 한국독립당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 조소앙 일가의 독립운동 버팀목으로 자리매김

부인 오영선

오영선(1887~1961)은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에서 태어났다. 조소앙과 혼인해 남편은 물론 자녀와 손자 등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혼신을 다했다. 1914년경 중국으로 망명했다. 남편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런 만큼 시부모님 봉양과 자녀 양육 등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영선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며 독립운동의 뒷면에 있었다. 대부분 여성운동가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존재감은 1940년에야 드러난다. 6월에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여성혁맹동맹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 지원활동과 더불어 자녀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는 교육활동에 헌신적이었다. 또한 한국독립당 당원으로서 임시정부 지원에 남다른 활동을 전개했다. 오영선의 적극적인 활동은 남편의 삼균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들 조시제는 한국독립당의 화랑사에 가입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상해한인청년당을 조직하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딸 조계림과 남편의 두 번째 부인 최형록 등도 그녀와 활동을 같이 했다. 여기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뇌와 역할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인생여정은 임시정부의 존재감을 굳건하게 이어나가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한국전쟁 중 남편은 ‘요인모시기’ 작전으로 납북되는 비운을 맞았다. 독립운동 중 남편과 생이별은 일상사와 같은 나날이었다. 슬픔에 안주하지 않고 일가의 가정사는 오로지 그녀의 몫으로 다시 시작됐다. 올곧고 헌신적인 독립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일군 하나의 진정한 밀알이 됐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올바로 평가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국가보훈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