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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9. 한국광복군의 영원한 동지, 신송식·오희영

3대 걸친 항일투쟁… 독립운동으로 맺어진 공동운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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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영 부부 묘역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슬픈 이야기가 정설처럼 떠도는 현실이다. 3대 독립항쟁기념비는 할아버지에서부터 손자ㆍ손녀에 이르기까지 전 가족과 전 세대가 60년에 걸쳐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유명한 포수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할아버지 오인수(吳寅秀) 의병장, 만주 독립군에 이어 독립전쟁 일선에서 활약한 아버지 오광선(吳光鮮), 그리고 여성광복군으로 초모와 선전 활동에 나섰던 희영(吳姬英)ㆍ희옥(姬玉) 자매가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어머니 정현숙(처음 이름은 정정산)과 오희영 남편 신송식도 건국훈장을 받아 그야말로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동운명체였다.

■3대가 독립운동에 나서다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죽릉리 어현마을은 고개가 길게 늘어져 있어 ‘느리재’라고도 부른다. 산들이 휘감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이 마을 입구에는 이색적인 기념탑이 있다. ‘의병장 해주오공 인수’라는 문구와 함께 ‘3대 독립항쟁 기적비’라는 문구에서 새삼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2003년 해주 오씨 종친회에서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것이지만 흔치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할아버지 오인수는 1905년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정주원 의병부대와 연합작전도 전개하는 가운데 남상목ㆍ김군필 부대와 연합해 안성 매봉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에게 패한 후 빈총을 메고 애견과 함께 산야를 헤매다가 오인수는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고향집에 돌아왔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붙잡혔다. 7개월간의 모진 고문을 받은 후 8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해야 했다.

해주오씨3대독립운동기적비

■‘조국 광복 찾자’는 뜻 담아 개명…만주 독립군의 딸로 성장

토벌대에 끌려가는 아버지를 지켜본 어린 오광선은 죽은 애견을 땅에 묻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여준이 세운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서울의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에 이르자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다. 이름도 ‘조국의 광복을 되찾자’는 광선으로 바꾼 그는 마침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오광선에게 여준은 부친ㆍ부인 등과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한 달간의 여정 끝에 가족을 상봉한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약했다. 이어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 후 서로군정서의 중대장과 대대장, 별동대장과 경비대장 등을 맡아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이 와중에 액목현에서 첫딸 희영(1925년 4월23일생)에 이어 2년 후에 둘째딸 희옥(1927년 4월3일생)을 얻었다. 오광선은 한국독립당 군사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서 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대전자령전투 등 전장을 누비며 맹활약했다.

그는 이후 근거지를 중국 관내지역으로 옮겨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으로 파견돼 비밀첩보활동을 펼치다 체포됐다. 심문 과정에서 온갖 회유와 고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 신의주형무소에서 2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다시 하얼빈 인근으로 망명해 항일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신송식은 누구인가

신송식은 1914년 3월4일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 입석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진성경(陳敬誠)이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자 활동했다. 이듬해에는 국민혁명군 중앙포병 소위로 임명 배속돼 본격적인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1941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서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제1지대에 편성됐다가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전입돼 시안에서 활동했다. 1942년 초에는 광복군 제3지대 지대장인 김학규의 인솔로 일군의 점령지구를 돌파, 중국군 유격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부양에 도착해 그곳에서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에 병설로 설치된 한광반의 교관으로서 광복군 양성에 주력했고, 같은 해 임시정부 주석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던 오희영과 혼인했다. 1945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 참령 및 임시정부 주석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아 그는 교포의 귀국에 노력하다가 1946년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전원위원으로 활동, 이듬해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광복청년회 전위대장을 지내다 다시 타이완으로 가서 국민당정부 국방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1950년 2월 귀국해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사망했다. 사망 이듬해인 1974년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신송식

■임정의 품 안에서 여성광복군으로 활약한 희옥

아버지 오광선이 특수 임무를 띠고 베이징으로 파견될 무렵, 어머니 정현숙과 희영ㆍ희옥 자매는 직속상관인 지청천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전란을 피해 난징으로 이동해 임시정부 요인들 가족과 합류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오희영 가족도 난징에서 치장으로, 다시 충칭으로 이동했다. 치장의 투차오에서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한인촌이 형성되면서 투차오는 이전보다 안정적인 생활공동체로서 자리매김했다. 교회와 유치원이 있었고, 한인 자녀들은 화시탄 건너편의 청화중학에 다녔다. 투차오를 방문한 양우조는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언덕에 있는 YWCA 회관과 민가에서는 아이들을 모아 한국말과 한국노래를 가르치고 있어 그 앞을 지날 때면 고향에 온 느낌이 들곤 했다”(제시의 일기)고 기록했다.

어머니는 한국혁명여성동맹 맹원으로 활동했다. 희영과 희옥 자매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했다. 오희영은 아버지 복수를 한다며 한국광복군 제3지대 산하의 징모처 제6분처 대원으로서 안후이성 푸양으로 가서 각종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주로 광복군의 활동을 대내외에 선전해 일제에 징병된 한인 학병을 탈출시키거나 첩보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던 중 김구 주석의 비서와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혼인해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오희옥 역시 13세 나이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해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공작대대원들을 따라 중국인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가두선전을 하거나 전장의 군인들에게 노래와 무용을 선보이며 사기를 북돋았다. 18세가 되는 해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항일활동에 전념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그녀의 할아버지 오인수, 아버지 오광선, 언니 희영과 형부 신송식에 이어 자신과 어머니 정현숙도 늦게나마 건국훈장을 받았다. 세계사에 빛나는 독립운동의 명문가임을 알 수 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_국가보훈처 등 제공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