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7. 주체적 민족정신 강조 신채호·반려자 박자혜

항일언론 이끌며...독립운동 선봉장으로

카지노 도박 사이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의 남긴 명언이다. 단재는 언론인, 역사학자, 계몽활동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등 민족해방운동 선구자로서 일관된 인생 항로를 걸었다. 실증에 바탕을 둔 ‘과학적 역사학’을 주창하며 우리 근대역사학을 정립한 역사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가 열정을 불태운 역사학 연구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한민족의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했다. 외세 침략에 맞서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시대적인 사명감이 목적이었다. 단재는 박은식ㆍ정인보ㆍ문일평 등과 함께 ‘붓’으로써 대쪽 같던 민족 절개를 지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해박한 지식에 의한 객관적인 고증은 물론 현장 답사에서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독자적인 민족사관 정립은 주체적인 한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결정적 첫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하는 상황은 현실 인식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선언은 이를 방증한다. 우리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냉철한 역사인식은 여기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자유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단재는 우리와 함께 호흡한다.

 

신채호박자혜 부부 동상

항일언론 이끌며 민중계몽 가열

단재는 1880년 12월8일(음력 11월7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령, 필명 금협산인ㆍ무애생, 호는 단재ㆍ일편단생ㆍ단생 등 다양하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집안은 전통적인 학문과 아울러 신교육을 수용하는 등 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적인 재능이 출중해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았다. 16세에 풍양 조씨와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나 조씨는 곧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던 단재는 일시적으로 인생 비애를 느끼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활동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신기선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박사로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등 약관에 자자한 명성을 얻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가운데 날벼락 같은 을사늑약에 크게 분노해 관직을 그만뒀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경험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무언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항일언론인 표상이 됐다. 일제 침략에 대한 날카로운 논조는 식민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난 극복에 앞장선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통한 민족의식 앙양은 자신의 책무로 인식했다. 통감부는 단재의 언론활동을 억압하는 등 감시와 회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향한 바를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다.

또 단재는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등 국권회복에도 앞장섰다. 나랏빚 청산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함으로 근대적인 시민운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8년 한글로 된 <가정잡지> 발행에 동참하는 등 여권 신장에도 관심을 보였다. 또한 <대한협회회보>와 <기호흥학회월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진회 성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활동은 역사 속에서 한민족의 저력을 재발견하는 중요한 토대였다.

해외로 망명, 독립운동 선봉장으로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식물 정부’와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합법적인 계몽운동조차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단재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로 망명해 그곳에서 안창호ㆍ이갑 등과 향후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 우리 역사 관련 글을 통해 한인사회에 민족정체성을 일깨웠다.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와 백두산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 무대를 답사했다. 사적지를 돌아보던 단재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역사서도 발간했다. 웅장한 서사시를 통해 한민족 자존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다. 답사 중 안타깝게도 돈이 없어 일본인이 파는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가격만 물어보고 사지 못했다고 한다. 단재의 역사에 대한 열정은 여기에서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하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신한청년회에 참가하면서 박달학원의 설립ㆍ운영에도 힘썼다. 장차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3ㆍ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 등 내분으로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 조달 중 체포… “독립은 쟁취하는 것”

단재의 애국에 대한 일념은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으로 인식한 대목이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라고 외치며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와 외로이 독립투쟁에 전념했다.

이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됐다. 1923년에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으로 독립 쟁취가 가능하다는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함으로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 다물단을 지도했다. 와중에도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는 등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전범을 보여줬다.

이회영ㆍ류자명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를 신봉,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해 1928년 잡지 <탈환> 발간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제적인 연대를 통한 ‘민족혁명’을 쟁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동지들과 합의를 거쳐 외국환을 입수해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자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돼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2월21일에 갑자기 옥사했다.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돼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롭게 해석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단재는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적인 사실을 비판했다.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해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