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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가을이 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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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올 때

                                       -박형준

뜰에 찬서리가 내려 국화가 지기 전에

아버지는 문에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그런 날, 뜰 앞에 서서 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일 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와 함께 바르시곤 문을

양지바른 담벼락에 기대어놓으셨다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단

방에서 잠을 자는 첫 밤에는

달그림자가 길어져서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이 몹시 그리웠다

바람이 찾아와서

문풍지를 살랑살랑 흔드는 밤이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듯했다

꽃과 그늘과 바람이 숨을 쉬는

우리 집 방문에서

가을이 깊어갔다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창비, 2020

결이 고운 사람은 행동이 섬세하다. 거창한 일보다 일상의 작은 일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성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 삶의 면면은 풍족하고 빛나는 순간보다 힘들고, 어렵고, 지친 시간이 더 많다.

아름다운 사람은 삶의 고됨을 견디는 방법을 터득해 알고 있기에 주변을 환하게 만든다. 박형준 시인의 ?가을이 올 때?에 그려진 아버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다. 무더운 여름이 가고 ‘찬서리’가 내리는 날 “그해의 가장 좋은 국화꽃”을 따서 창호지에 발라 새로 문풍지를 만드는 섬세한 아버지. 가난하지만 뜰에 핀 국화를 보며 “일 년 중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미적(美的)인 태도에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그 답은 햇볕 잘 드는 담벼락에 새로 바른 문을 기대어 놓으며 “바람과 그늘이 잘 드나들어야 혀”라는 말에 담겨 있다.

성급한 마음에 문풍지를 햇볕에 말리면 뒤틀려 터진다. 시간이 더디더라도 그늘에서 바람으로 은근히 말려야 하는 것처럼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가르침일 것이다. 그래서 “잘 마른 창호지 문”을 새로 달고 자는 ‘첫 밤’에 달그림자를 보며 대처에서 일하는 누이와 형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이 “국화꽃이 창호지 안에서 그늘째 피어나는” 사태처럼 아늑하고 간절해 보인다. 안과 밖이 잘 통기(通氣)되어 꽃과 바람과 그늘이 고루 숨을 내쉬는 화자의 집 창호지에서 절로 깊어만 가는 가을밤의 풍경은 가난해도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것은 꽃을 바라볼 줄 알고, 가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때맞춰서 완수하는 아버지의 심미적 여유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창호지 안에 핀 국화처럼 안과 밖, 기쁨과 슬픔 등 대립해 막힌 것을 소통시켜 숨 쉬게 하는 아버지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들의 집을 아늑하고 환하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들이 마냥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신종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