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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3. 재한줌머인연대를 만나다

방글라데시 선주민 줌머족 끔찍한 탄압에 신음, 정든 모국 등지고 한국행 하나둘 양촌읍 정착
생계위해 인내의 시간… 귀화 성공 제2의 인생, 여전히 난민 인정 못받아 힘겨운 시간 보내기도
재한줌머인연대 비좁은 공간이지만 희망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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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 자리잡은 줌머인들이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윤원규기자∙재한줌머인연대 제공

경기도 김포에는 현재 약 1만 8천 명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수도권에서는 안산, 화성, 시흥, 부천, 평택에 이어 6번째로 많고, 전국에서는 8번째로 외국인이 많은 곳이다. 일자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자리한 학운산업단지가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제조업들이 밀집해 있다. 이 같은 지역적 특성 때문에 김포에는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가 설립돼 운영 중이다. 김포 지역 내 외국인들을 위해 통역, 상담 등의 서비스는 물론, 만남의 장도 제공한다. 기자가 방문했던 지난 9일은 일요일이었음에도 평일처럼 직원들이 출근해 일하고 있었다. 주말밖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외국인들을 배려한 조치다. 센터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내부에는 다양한 언어로 응대할 수 있는 직원들이 상주해 있었다. 강의실과 강당, 컴퓨터 교육실, 무료진료소, 다문화 전시관 등 각종 편의시설도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난민 출신인 로넬 차크마 나니(49) 씨를 만났다. 김포에는 741명(3월 31일 기준)의 난민(난민 인정자, 인도적 체류허가자, 난민 신청자 등)들이 거주 중이다. 이 가운데 줌머족 출신 난민은 대략 150여 명 정도다. 이들 대부분이 난민으로 인정받아 김포에 터를 잡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이나니’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로넬 씨는 “저는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 산악지대에서 살던 줌머라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줌머인들이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다. 윤원규기자∙재한줌머인연대 제공

■ 제2의 고향이 된 김포

줌머족은 방글라데시의 선주민으로 전체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후 본격적으로 줌머족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고 일부는 박해를 피해 태국, 인도 등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 중 한국으로 들어온 이들이 현재 김포에 사는 줌머인들이다. 김포시 양촌읍 양곡 줌머 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기 시작했고 2002년 재한줌머인연대(Jumma People‘s Network-Korea)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로넬 씨 역시 당시 줌머인연대를 함께 설립한 멤버 중 하나다. 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에 왔다가 줌머족 지도부와 방글라데시 정부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다시 귀국했다. 하지만, 협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2000년대 초 다시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부평을 찾았다. 생계를 위해선 일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고 고민 끝에 이미 줌머족들이 살고 있던 김포로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로넬씨와 김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로넬 씨는 “처음에는 제조업 공장에서 도금하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첫 직장은 일주일 만에 그만뒀다. 아무래도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며 “김포로 이사를 온 후에는 계속 단순 노동만 했다. 일은 아는 사람을 통해 소개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회사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2010년 한국어를 배웠고, 이후 영어학원에서 일 년 정도 일하기도 했다. 이곳 센터에서는 2012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재한줌머인들이 방글라데시 정부의 줌머족 탄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윤원규기자∙재한줌머인연대 제공

한국어 공부는 로넬 씨에게 있어서 확실한 전환점이 됐다. 직장을 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문화, 생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고, 덕분에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2007년부터는 난민들을 위한 통역도 할 수 있었고,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소수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귀화를 통해 어엿한 한국인으로 거듭난 로넬 씨는 김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지금의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생활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 난민이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 100%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하고 있다”면서도 “아무래도 외국인이라는 한계가 있다. 고용주가 대부분 한국사람이다 보니 갑질을 하거나 무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난민들을 이해해주시는 분들도 매우 많다”고 지금의 난민들이 처한 현실을 언급했다.

2018년 제주 예맨 난민 사태 이후 대한민국에도 난민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난민 문제는 다른 나라 얘기다. 이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을 찾는 난민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어 당분간 난민의 숫자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로넬 씨는 “재정착 난민은 법무부나 관련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정착 지원을 해주고 있다. 주거 지원도 이뤄진다. 또 각종 사회생활 안내 같은 것들도 지원하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은 그런 지원 체계가 없다. 그저 난민으로 인정만 해주고 알아서 살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서 인정된 난민들은 일자리나 주거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있다. 그냥 알아서 살겠지라는 인식보다 난민을 위한 체계적인 안내 또는 관리 제도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방글라데시 줌머인 보이사비 축제 현장. 윤원규기자∙재한줌머인연대 제공

■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을 찾아가다

김포시외국인주민지원센터를 뒤로 하고 향한 곳은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이었다. 양촌읍 양곡리에 소재한 이곳은 겉으로는 평범한 상가건물이었다. 2층에는 ’김포이주민센터 ‘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 이발소가 있었다. 재한줌머인연대 사무실은 바로 옆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방글라데시 소수민족들을 표시한 월페이퍼가 한 눈에 들어왔다. 60인치 정도 되는 대형 TV도 놓여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는 수많은 책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사무실은 김포에 사는 줌머인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운영하고 있다. 재한줌머인연대는 회장을 중심으로 사무국장, 재무부장 등 분야별 임원들이 활동 중이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사무실에는 인터뷰를 약속한 라트나 키르티 차크마(42)씨와 사무국장인 니키 차크마 씨도 함께 있었다. 이들은 서로 한국말을 잘한다며 인터뷰를 미루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진지한 모습으로 줌머인들이 처한 상황과 난민으로서 한국에 사는 어려움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라트나 씨는 재한줌머인연대 회장직을 맡아 줌머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신분은 난민 인정자가 아닌 난민 신청자다.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지만 생계도 함께 해결해야 하기에 제약이 많다. 난민 신청자는 난민 인정 신청을 한 후 6개월이 지나야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고 취업이 먼저 확정돼야 허가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지인 소개를 받아 일하는 경우가 많아 합법적인 취업 활동 허가를 받기가 어렵다. 라트나 씨도 틈틈이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상황이다. 천막을 용접하는 일을 하며 일당으로 약 15만 원 정도를 받고 있다.

라트나 씨는 “2008년 처음 한국에 왔다. 종교 탄압을 받아 한국에 와 난민을 신청했지만, 첫 번째는 떨어지고 지금 두 번째 신청해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며 “그러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지금은 용접도 할 줄 알고 운전도 잘해서 주변에서 틈틈이 일자리를 소개해준다. 하지만, 난민 신청자라 외국인 등록증이 없어 정식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건 힘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난민 출신인 로넬 차크마 나니 씨/라트나 키르티 차크마 재한줌머인연대 사무국장.  윤원규기자∙재한줌머인연대 제공

능숙한 한국어는 대학에서 공부했다. 원래 스님이었던 라트나 씨는 처음 한국에 와 경상북도 영주의 한 절에서 약 2년간 거주했다. 당시 인연을 맺은 한 스님이 동국대학교를 추천해줬고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덕분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지만 난민 신청자라는 신분이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으며 취업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두 번째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라트나 씨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며 한국에 사는 난민들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난민들은 자기 나라에서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어서 다른 나라로 간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교 문제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우리가 난민 신청을 하는 이유는 살아야 해서다. 우리도 사람이니까 살고 싶은 거다. 나 역시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까 난민 신청을 하는 거다. 어느새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난민 인정을 못 받아서 힘들긴 하다.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그래도 재밌게 살고 있다.”

장영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