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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난민 취업실태] 2. 부평에 터 잡은 미얀마 난민들

민주화 운동 ‘난민신세’… 제2의 고향서 ‘인생 2막’
부평1동 광장로 일대 등 미얀마인 426명 거주
골목 들어서면 군부 쿠데타 규탄 포스터 눈길
대부분 최저임금 받으며 공장 생산직·허드렛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한때 정치적 난민이었어요”
바라는 것은 단 하나 ‘편견과 차별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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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역 일원 다수 위치한 여인숙 등 값싼 숙박시설은 미얀마인들이 집결해 살게된 계기가 됐다. 장영준·윤원규기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찌푸렸던 지난 4일 오후 인천 부평역 앞. 평일이라 거리는 한산했지만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작은 백팩을 메고 있던 이들은 한눈에 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을 역전지구대가 위치한 5번 출구 앞으로 옮기자 그곳에는 ‘미얀마 거리’로 알려진 부평1동 광장로 4번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화려한 모텔 간판들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골목 안쪽에서 낯선 문자로 쓰인 간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간판 아래 조그마한 글씨로 이곳이 ‘미얀마 식당’임을 알리고 있었다. 식당 외벽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 운동을 응원한다는 내용의 현수막들이 붙어 있었다. 자국민에 대한 폭력진압을 이끄는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을 규탄하는 포스터도 있었다. 골목 구석구석 자리잡은 미얀마 식당들은 이곳이 대표적인 미얀마 커뮤니티임을 실감하게 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 3월 통계월보에 따르면 현재 인천 부평구에는 총 426명의 미얀마인이 거주 중이다. 이 가운데 난민 인정자는 149명이며 이들 대다수가 지난 2015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재정착 난민 수용 시범사업’을 통해 국내에 입국했다. 이들은 입국 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며 한국어, 한국사회 적응, 기초 법질서 교육 등을 받은 뒤 부평으로 이동했다.

(왼쪽부터) 경기일보와 인터뷰 중인 미얀마 출신 난민 투안 상 씨/미얀마 출신 난민 얀 나이투 씨. 장영준·윤원규기자

■ 난민이 된 물리학도

현재 부평구 십정동에 자리잡은 투안 상(44)씨는 2000년에 처음 한국땅을 밟고 나서 현재까지 가족들과 살고 있다. 그가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그도 다른 난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런 정부 지원 없이 오롯이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공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을 해야 했다.

투안 상 씨는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보통 일자리는 친구들 소개로 얻는다. 처음에는 일당을 받으며 일했다. 그러다 일이 없으면 직업소개소를 찾기도 했다”며 “부평에는 10년 전에 왔다. 처음 일을 했던 곳도 이쪽이어서 오게 됐다. 지금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계속 살게 됐다”고 말했다.

모국인 미얀마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한 엘리트 대학생이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운동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고, 투안 상 씨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하지만 그 일로 학교는 퇴교 조치를 내렸고, 그는 더는 미얀마에 머물 수 없었다. 어렵사리 한국에 왔지만 낯선 땅에서 자신의 전공을 살릴 길은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해 공부를 이어갈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수차례 직장을 옮겨다닌 끝에 3년 전부터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강화 플라스틱을 이용해 FRP 물탱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월급은 300만원 정도이지만 아이 둘을 양육하는 데에는 많이 부족하다. 아내도 돈을 벌고자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대부분의 아르바이트가 풀타임을 요구했고, 파트타임으로 육아를 병행하려던 아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친구들의 사정도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최저임금만을 받으며 생활해야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아직 한국어를 하지 못해 취업 자체를 힘들어하는 이들도 많다. 투안 상 씨는 “아직도 많은 난민이 공장 생산직이나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지만 그럴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일자리를 알선하는 한 직업소개소 관계자는 “최근에는 난민들을 (취업처에) 거의 소개해 준 적이 없다. (취업을) 요청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며 “코로나19 이후로는 문의도 없다. 지금까지 난민들이 취업한 곳은 대부분 공장”이라고 전했다.

미얀마 불교사원 내부 모습. 이 같은 사원이 부평역 인근에만 7곳이 있다. 장영준·윤원규기자

■ 사원을 중심으로 모인 난민들

부평역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불교 사원이 하나 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카펫이 깔린 넓은 공간이 등장한다. 정면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내자 그 안에 화려하게 차려진 제단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처님 불상을 중심으로 화려한 꽃 장식이 어우러져 있었고, 한쪽에는 미얀마 스님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미얀마 사원 내부의 모습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현재 부평에 7개의 미얀마 사원이 있는데, 이곳도 그 중 하나다. 이 지역의 사원들은 미얀마 난민들이 부평에 머무르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한 얀 나이투(51) 씨도 그러한 이유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는 현재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회장을 맡아 미얀마 군부 쿠데타 규탄 국내 집회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얀 나이투 씨는 1992년 처음 한국에 왔다. 당시는 한국에서 외국인을 보기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의 친구 아들이 한국에 있어 일자리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같은 미얀마인과 결혼까지 해 완전히 한국에 정착했다. 현재는 목재를 CNC가공하는 일을 하며 월 280~290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 역시 미얀마에서 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미얀마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게 태국을 거쳐 한국까지 오게 됐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학업을 모두 마치지 못한 탓에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손을 대야 했다. 부평에 머물고 있는 미얀마인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얀 나이투 씨는 “부평에 사는 미얀마인들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허드렛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며 “예전에는 난민이라고 하면 안 좋게 봤다. 그냥 돈 벌러 온 외국인으로 인식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부평역 미얀마인 거리 곳곳에 있는 민주화요구 포스터. 장영준·윤원규기자

■ “난민이라고 차별하지 말아주세요”

부평역에서 약 30분가량 차를 타고 가면 ‘남동공단’이라 불리는 남동산업단지가 나온다. 인천 남동구 남촌동, 논현동, 고잔동을 중심으로 약 957만 4㎡에 걸쳐 조성된 이 단지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식품·섬유·목재·제지·석유화학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간 인력 수요가 풍부하다는 점 때문에 난민뿐 아니라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부평을 찾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 변했다. 예전과 비교하면 일자리가 줄었다. 난민들은 안정적이고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부평에서 인근 시화 또는 반월공단으로 옮겨가고 있다. 아직 부평에도 일자리가 있지만 대부분 한국인이 꺼리는 이른바 ‘3D 업종’이다.

그럼에도 부평은 여전히 미얀마인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곳이다. 미얀마 글씨와 음식들이 그들을 반기고 있고 종교활동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얀 나이툰 씨와의 인터뷰에서 통역을 맡았던 원라이 씨는 “정치적 난민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식당, 식료품 가게, 사원들이 있어서 거주하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미얀마 난민들의 숫자가 많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안 상 씨도, 얀 나이투 씨도, 원라이 씨도 한국에 바라는 건 하나였다. 난민이라고 차별하지 말아달라는 것. 어쩔 수 없이 난민이 됐고, 어쩌다 한국까지 왔지만 이제는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신들을 동등하게 대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에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얀 나이투 씨가 답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난민이었어요. 또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 하셨던 분들도 과거 유럽이나 터키, 미국 등에 많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난민이었습니다. 저희도 난민으로서 한국에 정착해 고향을 그리워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인간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장영준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