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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부 독립운동가를 찾아서] 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살림꾼 연미당·파수꾼 엄항섭

신혼 단꿈도 못 꾼채… 임시정부 지원 ‘숨은 일꾼’
“조국 독립이 최고의 가치관” 강조한 아버지 연병환 핏줄 이어
연미당, 옷세탁·삯바느질로 번돈 능력 닿는대로 임시정부 도와
남편 엄항섭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 19세 나이에 부부 인연
둘 모두 가정 돌볼 틈 없이… 한인애국단 참여 김구 지원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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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ㆍ1운동 직후 민주 공화제를 내세웠다. 신민이 아니라 국민이 주권임을 표방하는 대사건이었다. 임시정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임시정부 숨은 일꾼’으로 활동한 연미당(본명은 연충효ㆍ延忠孝)과 남편 엄항섭도 주역이었다. 

 

■ 핏줄로 이어받은 독립운동 의식

연미당은 연병환(어릴 때는 병우)과 김정숙 딸로 1908년 7월 중국 동북지역 륭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관립외국어학교를 다니는 등 문명사회 건설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졸업한 후 진남포ㆍ인천 해관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일제 침략에 분개하여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했다. 아버지는 오직 조국 독립이 최고의 가치관으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중국에서 무장투쟁을 지원하다가 구속되는 등 독립운동과 여정을 함께 했다.

삼촌 연병호는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졌다. 3ㆍ1운동 1주년을 맞아 ‘독립신문’ 1920년 3월1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동포여! 우리는 참담한 멸망을 면하여 자생을 도모하려 하니 전쟁을 하면 살아나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 죽을지라”며 독립전쟁론을 주장하였다.

집안에는 항상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은 항상 외롭고 외톨이와 같은 존재였다. 다만 독립군의 중국 동북지역에서 무장투쟁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자 ‘청량제’로 다가왔다. 무엇이 조국이고 왜 부모님이 이국땅 중국에서 고민하는지를 미약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일제의 탄압으로 생활 근거지를 중국 관내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동생 연병호 등을 상하이로 불러 독립운동에 매진하도록 부탁했다. 아버지 연병환에게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은 염원이자 최고 희망봉이었다. 이에 부합하여 삼촌 등은 자신들 안일보다 민족적인 과제 해결에 나섰다.

 

■ 엄항섭과 인연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이러한 분위기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이 의미를 새롭게 인식했다. 아버지와 삼촌 연병호 등을 찾아오는 인물들도 보통으로 보이지 않았다. 난징 부근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빈번하게 접촉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벌픽 작가 등의 활동 속에서 민족을 다시 보는 현장이었다. 부모님은 발랄한 딸에 대한 애정을 무한하게 보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숙환으로 1926년에 사망했다. 방황하던 시간도 잠시였다.

비록 연령은 많지만,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엄항섭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다. 눈치를 채고 이에 나선 사람이 있었다. 부부 인연을 맺은 준 사람은 임시정부 어른인 석오 이동녕이었다. 이때 연미당 나이는 19세였다. 물론 당시로선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앳된 신부’로 연미당을 바라본다.

꿈에도 그리된 ‘신혼 단꿈’은 역시 한 폭에 꿈이었다. 임시정부 안사람의 역할은 다양하고 막중하였다. 남편 내조는 물론 가족들에 대한 생계 책임과 자녀 교육문제도 고스란히 그녀 몫이었다.

■ 독립군 사기진작, 임시정부 지원 등에 전력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를 지원에 앞장섰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에 나섰다. 매년 8월29일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물 위에 뜬’ 정부였다. 남편은 중국정부와 연락 임무를 맡아 가정을 돌볼 틈이 없을 만큼 분주했다. 연미당은 임시정부 가족을 돌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폐결핵에 걸려 각혈하는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힘든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척스러운 부인 모습은 남편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원이었다.

독립운동 중에도 옷 세탁과 삯바느질로 돈을 벌어 능력이 닿는 대로 임시정부 지원에 앞장섰다.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할 때 광복군 모집에 열성을 다했다. 환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남편이 먼저 귀국하여 이별을 맞는 순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귀국을 준비하는 동포들의 안전에 많이 노력하였다.

딸 엄기선도 독립투사로서 키웠다. 중국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리는데 매진했다. 또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여 광복군으로 합류를 권유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하는 등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도 열성적이었다.

■ 엄항섭이 역사무대에 등장하다

엄항섭은 1898년 9월1일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 90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세영으로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엄주완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외할아버지는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굳게 다짐한 후 곧바로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민주 공화제를 천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1919년 9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연해주ㆍ상하이ㆍ서울 등지에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는 통합되어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그는 항저우에 있는 지장(芝江)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ㆍ영어ㆍ불어 등 어학 공부에 열정적이었다. 이는 훗날 다양한 외교활동을 펼치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사진=애국지사 염병환ㆍ염병호 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