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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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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함민복

양철지붕이 소리 내어 읽는다

씨앗은 약속

씨앗 같은 약속 참 많았구나

그리운 사람

내리는 봄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개가

가죽 비틀어 빗방울을 턴다

마른 풀잎 이제 마음 놓고 썩게

풀씨들은 단단해졌다

봄비야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 누구냐

꽃 피는 것 보면 알지

그리운 얼굴 먼저 떠오르지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그리움으로 연결된 약속

어김없이 또 봄이 왔다. 꽃들이 다투어 피고, 냉이며 쑥이 들판에 지천인데 마음은 겨울 들판처럼 휑하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봄이 이리 냉랭해진 걸까? 곰곰이 되짚어보아도 시원한 답이 없다. 애써 떠올린 게 고작 사람살이의 온기가 식어 그런 것 같다는 식상하고 궁핍한 생각뿐이었는데, 시인 함민복이 “꽃피는 것 보면 알지”라며 궁핍의 소로(小路)에 길목을 터준다. 그랬다. 핀 꽃을 즐길 줄만 알았지 그 꽃이 어떻게 피는지를 늘 지나쳤었다. 큰 것만 보고 작은 것은 보지 못했으며, 그리움보다 서운함을 먼저 내세웠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았을 것은 당연하다. 한 때 약속이란 지켜지기보다 깨지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는 거친 논리를 남들에게 전하기도 했는데, 아마 그런 억견(臆見)을 나는 패기와 동급으로 견주지 않았나 싶다.

패기는 정도(正道)에서 나와야 한다. 꽃이 피는 것은 씨앗의 약속이다. 약속을 지켜 꽃을 피우는 씨앗의 바른길, 그것이 봄의 세상이 아닐까? 씨앗의 약속이 맺어지려면 또 다른 약속이 있어야 한다. 꽃이 씨앗의 약속이라며, 씨앗은 봄비의 약속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약속이 되어 하나로 이어지는 게 그리움이다. 그리움으로 연결된 약속들에는 선후(先後)가 없다. 하여, “택시! 하고 너를 먼저 부른 씨앗은 누구냐”는 시인의 물음에 나는 아무도 먼저 부르지 않았고 아무도 늦게 부르지 않았다고 답하고자 한다. 마음 놓고 썩는 그리움의 단단한 약속들이 봄의 은유다. 너를 위해 내가 썩는 것이 약속이다. 그래야 꽃이 피고 그리운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약속함으로써 세상은 빛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시 '봄비'를 읽으며 절감한다. 우리는 서로의 약속이다.

신종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