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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강화 : 원도심 도보여행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와 문화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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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창체험관

한국관광공사가 2021~2022 한국관광 100선의 한 곳으로 선정한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는 1970년대까지 직물산업을 이끌던 강화읍 원도심을 걸으며 숨은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는 도보나들이코스다. 1300년경 고려시대에 심었다고 알려진 은행나무를 비롯해 폐 직물공장을 리모델한 소창체험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이었던 조양방직, 동서양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룬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등 특색 있는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스토리는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직물공장 ‘심도직물’로부터 시작된다. 심도직물은 1947년에 창업한 국내굴지의 직물회사였다. 1970년대에는 역직기 210대와 섬섬옥수의 1천200여명 미혼근로여성들이 정부의 ‘수출입국’의 기치아래 외국으로 수출할 제품들을 생산해 내었다. ‘웸블리넥타이’는 ‘심도직물’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으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다.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하며 국가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심도직물 터는 지금 용흥궁공원이 되었다. 30m가 넘었던 높이의 공장굴뚝 윗부분은 공원옆에다 세워 놓았고 그 주변에는 8월에 개화하는 직물의 원료인 목화나무도 심어뒀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 둘레십리 도심공간은 이색적인 역사와 문화의 관광보고

강화도를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한다. 강화의 역사와 문화가 소록소록 숨쉬는 이 박물관의 중심지역 강화의 원도심, 용흥궁공원에서부터 스토리가 시작된다. 이 공원은 삼도직물이 있었던 터다. 공원 한 켠에 이웃한 용흥궁은 조선왕조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4년 후에 지금처럼 짓고 용흥궁이라고 불렀다.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처럼 살림집 형태로 지어졌다. 용흥궁의 다른 한 쪽으로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언덕 위에 있는 대한성공회강화성당이 눈에 들어 온다. 이 성당의 내부는 유럽식이지만 외형은 전통 한옥양식으로 지어졌다. 1900년 11월에 축성, 처음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원의 한 쪽 길가에는 강화31독립만세기념비가 서 있다. 강화도에서는 1919년 3월7일, 강화읍 장날을 맞아 관청리 웃장터에서 강화군민과 김포군민 2만4천여명이 합세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어서 우리나라 가톨릭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노동사목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언덕으로 올라 서면 고려로부터 이어온 생명의 역사 700년 은행나무를 만나게 된다. 식물분류학의 이학박사 박지극 시인은 ‘은행나무’라는 그의 시 여러 편에서 ‘은행나무는 100년의 세월, 나이를 먹게 되면 소리를 낸다’고 했다. 강화도의 이 은행나무는 치욕의 병자호란 때는 슬픔의 소리를 질렀고 나무 바로 아래 쪽에 살던 한 농부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물론 시인의 감성이겠지만, 큰 은행나무는 실제로 세찬 바람에 큰 소리를 낸다. 강화의 은행나무는 강화의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떠났지만, 오랜 세월 ‘국태민안’을 기원하면서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보며 굳건하게 서 있다.

 

조양방직

■ 강화에는 산업·종교·전쟁이 있었다

발길은 계속, 강화 직물산업의 흔적 ‘이화견직 담장길’ 스토리보드를 걷는다. 1970년대까지 강화읍은 우리나라 최고의 직물 생산지로 당시 직물업계의 선두를 달리던 대구와 견줄만큼 직물산업이 번성하였다. 당시 강화읍에는 심도직물을 위시하여 이화직물(견직), 조양방직, 평화직물 등 크고 작은 수십 개의 직물공장이 있었다. 스토리보드는 강화 직물산업의 역사, 강화 사람들, 직물공장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1953년에 설립한 이화직물이 있었던 공장의 담장은 최대한 원래의 모습대로 살려 놓았고 직조기와 공장전경은 부조형식으로 제작해서 당시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다. 강화의 직물역사를 품은 핵심, 조양방직은 지금 리모델링으로 카페로 변신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조양방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공장으로 196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했지만, 1990년대로 접어 들면서 값싼 중국산 직물에 밀려 쇠락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이들 직물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1934년부터 전기가 들어 왔고 전국의 어느 곳보다 먼저 발전한 곳이 되었다.

1900년에 창립, 섬사람들의 교육과 계몽,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잠두교회는 강화읍교회를 거쳐 1976년 강화중앙교회로 명칭을 바꾸고 위용을 자랑하면서 강화읍 향나무길에 우뚝 서 있다. 1901년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으로 시작된 합일초등학교는 기독교신앙으로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을 펼쳤다.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스토리보드는 김구선생의 휘호 ‘홍익인간’과 독립운동을 했던 강화사람들에 대한 판결문을 부조형식으로 만들었다.

‘원도심스토리워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곳이 ‘소창체험관’이다. 반 세기 전 우리가 사용했던 많은 면직물이 소창이었다. 소창체험관은 1956년에 설립된 평화직물을 강화군에서 매입해서 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체험들을 할 수가 있다.

원도심의 상징같은 고려궁지와 강화산성은 전쟁과 관련된 시설물로 섬 주변 해안에 즐비한 돈대와 함께 전쟁을 말해 주는 흔적들이다. 그 만큼 강화도는 전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섬이다.

강화산성 북문

글=우촌 박재곤 / 사진=강화군청ㆍ심재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