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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사아 선종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④문정왕후의 회암사 무차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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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 말사

■ 손자 잃은 대비의 절절한 발원

1565년(명종 20년) 회암사에서 열린 무차대회(無遮大會:승려·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해 법문을 듣는 법회)의 풍경은 억불숭유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했다. 수천명의 승려들이 참석하고 수만명의 불자들이 몰려든 이 법회는 회암사 중창불사(重創佛事) 낙성식을 겸해 열린 행사였다.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불단이 꾸려졌고, 하늘에는 비단으로 만든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무차대회를 위해 제작된 불화의 수만 400여점에 달했다. 이처럼 사치스러운 법회는 이전에 듣도 보도 못했고 왕실 창고가 모두 고갈됐다는 탄식이 유학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회암사 무차대회를 주최한 이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였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을 대신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대비는 허응당 보우를 등용해 각종 불교정책을 펼쳐나갔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래 100여년간 유학자 관료들이 투쟁 끝에 폐지시킨 승과(僧科), 도첩제(度牒制), 선교양종(禪敎兩宗) 등의 제도가 부활했다. 흔히 명종대를 일컬어 ‘불교미술의 르네상스’라고 칭하는데 조선시대 제작된 최고의 불화들은 대부분 문정왕후의 시주로 조성된 작품들이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왜 ‘1565년’에 ‘회암사’에서 불사를 진행했을까.

회암사 무차대회가 열리기 2년 전인 1563년(명종 18년) 명종의 유일한 자식인 순회세자가 1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명종에게는 1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오로지 인순왕후만 순회세자를 낳았고 나머지 후궁들은 딸 한명도 생산하지 못했다. 그토록 귀한 혈육이 세상을 떠났으니 종통이 끊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순회세자가 사망한 직후 문정왕후는 보우의 권유로 대대적인 회암사 중창불사를 진행했다. 2년만에 회암사 중창불사가 완료하자 문정왕후는 대대적인 무차대회를 개최했다. 무차대회는 뭍과 물의 모든 중생이 신분이나 빈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덕을 받든다는 의미의 불교행사로 문정왕후는 이를 통해 명종이 후사를 얻기를 발원했다.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_1565년_보물 제2012호_국립중앙박물관

■ 선왕들의 은덕 얻으려 회암사 선택

문정왕후가 후손을 얻기 위해 회암사를 복전(福田)으로 정한 데는 이곳이 여타 왕실원당과는 격이 다른 특별한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회암사에는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한 어실이 있었다.

명종실록에서 ‘모든 능의 기신재(忌晨齋:왕의 기일에 열리는 불교식 제사)가 회암사에서 열린다’고 할 정도로 회암사는 왕실불교의 핵심 사찰이었다. 따라서 문정왕후 입장에서 볼 때 회암사는 명종의 조상인 조선 역대왕의 은덕과 불보살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힘을 줌)를 동시에 빌기 위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무차대회를 계기로 회암사는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달이 이지러지기 직전의 마지막 변곡점이었다. 문정왕후는 회암사 무차대회를 준비하면서 매일 냉수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64세의 고령에 냉욕을 한 게 무리였던 탓인지 문정왕후는 심한 독감에 걸렸고 무차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대비의 죽음으로 인해 무차대회는 중단됐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회암사에도, 조선 불교계에도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대비가 사망한 직후 보우는 제주로 유배를 갔고 불교중흥책은 모조리 폐기됐다. 문정왕후의 마지막 불사 현장이자 왕실불교의 상징인 회암사는 유생들의 표적이 됐다. 유생들이 회암사에 방화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명종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편, 조선전기_국립중앙박물관

■ 서서히 무너져간 동국 제일 가람

한때 동국 제일의 사찰로 꼽히던 회암사는 언제 폐사했을까. 일반적으로 회암사는 명종대에 유생들의 방화로 폐사했다거나 임진왜란 때 왜적들의 침입으로 폐사됐다고 서술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선조~인조대도 회암사는 왕실사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암사가 선조대를 전후해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3년째 되는 1595년 ‘회암사 옛터에 있던 큰 종을 녹여 조총을 만들겠다’는 선조실록의 기록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 회암사가 빈 절이 됐음을 알려준다. 그 시점이 명종대인지, 선조대인지에 대해선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회암사지의 유구들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숨겨진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회암사지에선 모두 12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는데, 대부분의 유적층에서 16세기말 전소된 흔적이 나타났다. 2단지에선 불에 타다 만 마룻바닥이 확인됐고, 4단지에선 불에 탄 문짝의 목재가 나타났으며, 8단지에선 지붕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게 그대로 드러났다. 즉 16세기의 어느 한 시기에 회암사 전체가 불에 타 무너져내렸음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만으로는 회암사의 화재가 명종대 유생들의 방화사건인지,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소행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그런데 회암사지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출토된 불상 대부분이 목이 잘렸다는 점이다. 어떤 불상은 머리와 몸통 등이 매우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각각 발견되기도 했다. ‘불교 말살’을 외치던 특정 집단에 의해 인위적으로 불상의 훼손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회암사는 16세기 전소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실사찰로 유지됐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선조 38년) 선조는 “회암사에서 선왕의 어실을 수리하는 동안 잡역으로 침해하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고, 1626년(인조 4년) 종실인 항상군 이정이 회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의 지원에도 조선후기 회암사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숙종 12년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양주 회암면 사람이 양안에 등록된 전답을 회암사에 보시했으나 지금은 주인 없이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 됐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회암사가 소유 전답을 관리하지 못할 정도로 퇴락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암사지 출토 청 기와_고려말 조선초, 국립중앙박물관

■ 왕실 최고 사찰의 명암

승정원일기를 끝으로 회암사에 관한 기록은 19세기 초까지 역사서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한때 동국 제일의 사찰로 꼽히던, 조선 최초 왕사의 하산소로 지정됐었던, 역대 왕의 위패를 봉안했던 사찰이 어떻게 승려 1명 없는 빈 절이 됐을까.

결과론적으로 유추해볼 때 회암사의 화려한 역사는 사실상 사찰의 ‘자립’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회암사는 공민왕대 고려 왕실 지원으로 크게 조성됐고, 조선 전기 내내 왕실의 끊이지 않은 경제적 지원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원경왕후, 정희왕후, 정현왕후, 문정왕후 등 역대 대비들이 독실한 불교신앙을 갖고 회암사에 대해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하지만 선조대 이후 사림정치가 본격화되고 여성들의 발언권이 크게 약화되면서 왕실여성들의 불사 행위는 매우 소극적으로 변모했다. 회암사에 대한 대비들의 대대적인 불사도 중단됐다. 왕실불교의 표상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은 오히려 유생들의 표적이 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조선후기 불교계의 변화들도 회암사의 쇠락을 부추겼다. 양란 이후 불교계의 중심세력이 된 휴정의 제자들은 나옹 혜근의 법통이 아닌 태고 보우의 법통임을 자처했다. 또한 양란 이후 조선의 민중들은 전란에 시신조차 찾지 못한 가족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찰에서 수륙재(水陸齋: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에게 공양을 드리는 불교의식)와 영산재(靈山齋:불교에서 영혼 천도를 위해 행하는 종교의례) 등을 설행했다. 불교계 안팎에선 불안한 민초들을 위무하기 위한 염불신앙이 크게 유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해 회암사가 적극적으로 대처한 흔적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회암사는 사회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채 점점 쇠락해져 갔고, 결국 17세기말에 이르면 승려 1명도 상주하지 않는 빈 절이 되고 말았다.

화려한 이력과 배경에도 억불숭유시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회암사는 결국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회암사지 출토 청동금탁_1394년_국립중앙박물관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