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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선종 사원의 전형 양주 회암사지] ②나옹의 회암사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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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비하르 날란다 대승원_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려의 나란타 세우라”는 당부를 받들다

인도 동부 비하르주에 있던 나란타사원은 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수많은 학승을 배출한 거대한 승원이다. 한때 1만명의 승려가 동시에 재학했을 정도로 나란타사원은 세계 최고의 불교대학이었다. 소설 ‘서유기’는 623년경 나란타사원으로 유학을 떠나던 당나라 승려 현장 법사의 구법행로를 모티브로 쓰인 이야기다.

현장이 인도 나란타사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700여년이 지난 뒤, 현장의 까마득한 후배인 지공이 서역을 거쳐 원의 수도 연경으로 왔다. 원 황실의 행향사(行香使:임금의 명령을 받고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는 벼슬아치)로 고려를 방문한 지공은 금강산의 법기도량을 방문한 뒤 경상도와 전라도의 여러 사찰을 유람하던 중 개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나란타사원과 아주 흡사하게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산 3곳과 물 2곳이 만나는 지점. 양주 천보산 자락에 있는 회암사였다. 젊은 시절 수학했던 나란타사원의 환영이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곳에서 수많은 선승이 배출될 예지통이 열렸던 것일까.

사실 일반인들의 육안으로 볼 때 인도 동부 갠지스강 유역 평원에 있는 나란타사원과 산줄기 사이의 작은 분지에 들어선 회암사지는 지형적으로는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회암사지는 산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길게 늘어선 분지 지형인 반면 나란타사원은 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넓은 평야지대에 있다.

그럼에도 왜 지공은 양주 천보산 자락을 ‘고려의 나란타’가 들어설 길지로 보았던 것일까. 오늘날의 학자들은 개경과 남경(현재의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 다수의 강의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길쭉한 평지, 학승들의 경제적 지원이 가능한 양주의 비옥한 토지 등이 최고의 불교대학이 들어설 후보지 조건으로 평가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양주 회암사지_사적 제128호

■원에서 지공의 수제자가 되다

양주에서 상경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공은 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려에 남긴 지공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고, 고려의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원의 수도 연경에 있는 법원사를 찾아갔다. 지공이 거하는 사찰의 승려 대부분이 고려승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법원사에는 고려 출신의 유학승들이 모여들었다.

1348년 법원사를 찾아간 젊은 고려의 승려는 몇 마디 문답으로 지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고려의 회암사에서 견성(見性:모든 망념과 미혹을 버리고 자기 본래의 성품인 자성을 깨달아 앎)을 경험했다 하는 젊은 학승의 그릇을 지공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지공은 10년간 법원사의 판수(板首:불교의 공양의식인 食堂作法의 구성원)를 나옹에게 맡겼다. 판수는 총림을 이끄는 직임으로 문도의 대표격인 자리였다. 훗날 공민왕의 왕사가 돼 고려의 개혁 불교계를 이끄는 나옹 혜근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10년간 법원사의 판수를 맡는 중에도 나옹은 중국 강남과 화북의 여러 사찰을 유력하면서 고승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인가를 받았다. 1353년 지공은 ‘종지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는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과 전법계를 주었다. 자신의 법통이 나옹에게 전해짐을 공표한 것이었다. 나옹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간다고 고하자 지공은 제자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다.

“고려에 돌아가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 나란타와 같은 사원을 세운다면 불법(佛法)이 크게 흥할 것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사리탑_보물 제228호

■공민왕의 불교 개혁에 가담

스승의 간곡한 당부를 안고 나옹은 고려로 돌아왔다. 고려는 나옹이 유학을 떠나기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나옹이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고려는 원의 간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 원 간섭기 고려에서는 원 황실의 원찰이 많이 늘어났고 권문세력과 결탁한 사찰들의 사원전과 노비 수가 크게 늘어났다.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의 혼란이 종교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나옹이 법원사에 수학하고 있을 무렵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독립’을 기치로 내세우고 각종 개혁조치를 시행해갔다. 공민왕은 불교계의 친원 성향을 누르고 새로운 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종교적으로도 개혁조치를 단행하고자 했다. 공민왕이 불교 개혁을 맡길 인물을 찾을 즈음 고려로 돌아온 나옹의 명성이 들려왔다. 10여년간 원에서 유학하며 당대 최고의 임제승들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고려에 온 달마’ 지공의 문하에서 수제자로 인정받은 나옹의 명성이 공민왕의 귀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공민왕은 나옹을 정중히 초청해 궁궐에서 법회를 열었다. 나옹의 설법을 들은 직후 공민왕과 그의 왕비 노국공주는 나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공민왕은 해주 신광사와 청평사 등 고려후기 대찰들의 주지로 임명했다. 아직 고려 내에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나옹을 신광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로 임명한 것은 매우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는 공민왕이 나옹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리고 공민왕의 불교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공부선(功夫選:고려ㆍ조선시대 승려에게 법계를 주기 위해 시행했던 과거시험)의 주관자로 위촉됐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영정, 1803년_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

■지공의 사리 봉안한 회암사 중창

그러던 중 1370년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도착했다. 지공의 사리가 개경에 도착하자 공민왕은 왕륜사에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얼마 뒤 지공의 사리는 회암사로 옮겨져 봉안됐다. 회암사는 나옹이 원으로 유학으로 떠나기 전 수학하던 사찰로 그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곳이었다. 공민왕은 지공의 수제자인 나옹을 왕사로 임명한 다음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를 세우고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것을 명했다. 공민왕이 회암사를 지공의 부도 조성 장소로 택한 데에는 지공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있었지만 지공의 법을 받들어 회암사를 불교개혁의 거점으로 삼아달라는 당부도 담겨 있었다. 이후 나옹은 회암사에 주석하면서 중창 불사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회암사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고려는 또 한번의 격변에 휘말렸다. 우왕 즉위 직후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들은 반대세력으로부터 대대적인 숙청당했고 그 중 한명이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이었다.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와중에도 나옹은 회암사 중창불사에 매진해 1376년(우왕 2년) 회암사를 완공시켰다.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당시 회암사의 화려한 모습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을 비롯해 총 262칸의 건물이 완성됐고, 15척(약 4.5m)에 달하는 불상이 7구에 달했다. 이색은 “크고 웅장하기가 동국에서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고 한다”고 전했다. 명실상부한 고려 최고의 절이 탄생한 것이었다.

오늘날 회암사지에 남아있는 회암사의 기본 골격은 나옹의 중창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옹이 중창하기 이전부터 회암사는 양주 천보산에 있던 사찰이었지만 중창 이전의 회암사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12차에 걸쳐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회암사지에서 가장 오래된 유구는 고려말의 것으로 그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천보산 자락에 회암사가 들어선 것은 나옹의 중창불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1376년 4월 회암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낙성식이 개최됐다. 260여 칸에 달하는 회암사의 낙성식은 매우 화려했다. 하지만 그토록 웅장하고 수려한 절이 완성된 그날, 회암사에는 나옹의 길을 막으며 대성통곡을 하는 신도들로 가득했다.

우왕은 나옹에게 회암사 낙성식 직후 밀양 영원사로 내려갈 것을 명했다. 사실상 공민왕의 왕사에 대한 숙청이자 정치적 유배였다. 회암사 열반문을 나서던 나옹은 목 놓아 통곡하는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디 노력하고 노력해 나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여행길은 마땅히 여흥(오늘날의 여주)에서 끝날 것이다.”

나옹은 밀양으로 내려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사망했다. 일설에는 반대파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지공이 나옹에게 내린 고려의 나란타를 세워 불법을 일으키라는 당부도, 공민왕이 나옹에게 당부했던 ‘개혁 불교의 기치’도 모두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나옹의 사망 이후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접지 않았다.

고려 불교계의 개혁세력으로 부상하던 나옹의 문도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세력들과 손을 잡았고,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지지 세력이 됐다. 나옹의 제자인 무학은 조선 최초의 왕사가 돼 회암사를 ‘고려의 나란타’가 아닌 ‘조선의 나란타’로 부활시켰다.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