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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파주 삼릉

후사 없이 요절한… 닮은 꼴 자매 왕비의 恨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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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삼릉의 역사는 예종 원비(元妃) 장순왕후가 공릉에 묻히면서 시작된다.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돼 당시 세자인 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이듬해 음력 11월 원손(元孫 예종의 장남)을 낳았으나 엿새 후 산후병으로 요절했다. 17살 꽃다운 나이였다. 세자빈 신분이라 원래 묘도 작았는데 후에 예종이 즉위하며 장순왕후(章順王后)로 추존되고 공릉으로 격상됐다. 어머니를 잃은 원손 인성대군(仁城大君)도 세 살 되던 1463년 풍질로 사망하는데 아명은 분(糞) 즉 ‘똥’이었다.

파주 삼릉의 순릉 석인과 석수가 저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릉은 진종(眞宗) 즉 효장세자와 비 효순왕후의 쌍릉이다. 효장세자는 영조가 왕자 시절 후궁에게 얻은 맏아들로 사도세자의 이복 형이며, 10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정빈 이씨는 동궁전 나인 출신이다. 효장세자가 태어난지 5년 뒤인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이듬해 효장세자는 왕세자가 되고 1년 뒤 조문명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순탄하던 삶은 1727년 11월 세자빈 조씨가 홍역을 앓아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큰 굴곡을 맞는다. 효장세자는 1728년 11월 옮긴 창경궁에서 열병과 안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훙서(薨逝)했다. 당년 10살, 부왕 영조는 35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남편이 죽고도 23년이나 더 살지만 유독 불운했다. 남편이 10살에 일찍 죽고, 후사도 없었다. 친정 부모상을 연이어 당했다. 평소 얼굴의 홍조 증상과 종기로 고생했고, 생애 후반 개창(옴)을 앓았다. 사망도 토황증 때문이었다. 1751년 11월 창덕궁 의춘헌(宜春軒)에서 승하해 이듬해 효장세자 묘 옆에 안장됐다. 영조는 며느리 상중에 며느리 시비(侍婢)를 건드려 후궁으로 삼으니 숙의 문씨다. 출생 날짜를 역산하면, 효장세자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상 중에 잉태됐다. 상중에 천한 나인을 건드린 점에서 영조의 여성 취향도 매우 독특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권세가 한명회의 한없는 권력욕… 국구(國舅)의 끝없는 과시욕

삼릉에 왕이나 왕비로 죽은 이는 순릉에 묻힌 성종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뿐이다. 공혜 왕후는 잔병 치레가 잦아 후사를 두지 못하고 19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12살 되던 1467년 세조의 손자며 요절한 의경세자의 차남 잘산군(山君)과 혼인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친정에 예단이 온 것은 정월 그것도 잘산군의 형 월산군의 혼례 5일만이었다. 1469년 잘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고 본인도 왕후로 책봉되지만 공혜왕후는 1473년 병으로 친정으로 옮겼다. 회복해 환궁했다가 병이 다시 도져 1474년 초 창덕궁으로 또 옮겼다. 성종과 그 조모, 양모, 생모 세 대비, 친정 부모가 차례로 들러 살폈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그해 4월 19세로 훙서했다.

파주 삼릉 안에 있는 공릉 비문에 장순왕후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있다.

예종 원비 장순왕후와 성종 원비 공혜왕후는 같은 부모에서 난 자매간이며 둘다 일찍 죽어 사실상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길래 자매 둘을 왕 2명에게 차례로 시집보냈을까.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큰 죄를 지었길래 딸 둘이 그런 불운을 당했을까. 그 아버지는 1453년, 수양대군의 반란 사건 즉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기획하고 실행한 주모자로, 수양대군이 “그대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오!”라 인정한 인물이다. 장자방 즉 장량(張良)은 중국 한나라를 건국한 한 고조 유방(劉邦)이, “장막 안에 앉아서 천하를 내다보고 계략을 세워 천 리 밖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평가한 최고 전략가다.

한명회는 정권 찬탈 (정난공신靖難功臣)뿐만 아니라 정권 유지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육신의 반정 기획을 차단하고(좌익공신佐翼功臣), 남이 장군 옥사를 매끄럽게 처리했다(익대공신翊戴功臣). 예종의 장남 제안대군이나 잘산군의 형 월산대군을 제치고 어린 사위 잘산군을 성종으로 즉위시켜(좌리공신佐理功臣) 18년 동안 네 차례 1등 공신이 됐다. 조선 500년 역사 최대의 위기인 임진왜란 7년 동안 무능하고 변덕심한 선조를 달래 국권을 유지한 서애 류성룡이 2등 호성공신(扈聖功臣)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한명회의 훈작이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파주 삼릉에서 시민 600여명이 세계문화유산 등재기념 고유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의 서울 강남 압구정동(狎鷗亭洞) 일대는 당대 권세가들의 별서 후보지 1순위였다. 만년의 한명회가 1번 타자로 정자를 짓고 명나라 문인 예겸에게 압구정, 즉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다. 뻬어난 경관으로 소문나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마다 압구정을 한번 들르겠다 고집했고 한명회는 잔치 핑계로 임금 전용의 차일(遮日)을 빌려달라고 사위 성종에게 두 번 세 번 강청했다. 진노한 성종이 한강의 정자를 허물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황희 정승이 은퇴해 파주 반구정에서 갈매기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거니와, 군자와 소인배는 은퇴해 갈매기를 벗하는 것조차 격이 달랐다. 실록의 한명회 평이다. “…번잡한 것 좋아하고 과시하기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이어지고, 너른 집을 차지하고 예쁜 첩을 많이 두니, 호사와 부유가 한 때에 떨쳤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