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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양주 대모산성

한강·임진강 흐르는 넉넉한 수운 갖춘 ‘必爭의 요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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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모산성:산성의 높이는 4~5m, 폭은 6~8m. 전체 1천400m 가운데 세 군데 70~80m 정도만 보존 상태가 좋다. 본벽 바깥에 경사지게 벽을 더 쌓아 본벽을 강화한 보축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남아있는 구간의 성벽은 아주 단단하게 잘 쌓여 있다.

오전 8시부터 3시간 좋이 산 중턱을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하릴없이 돌아섰다. 이정표도 없었고, 주민들도 전해오는 말만 전할 뿐 정작 가본 사람은 없었다. 가톨릭 의정부교구에서 운영하는 수련원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나은 길라잡이였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풀숲의 아침이슬에 흠뻑 젖은 바지가 무거웠고, 얼굴에 휘감기는 거미줄이 신경에 거슬렸다. 토끼길조차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자란 가시덤불에 팔과 어깨가 계속 긁혔다. 삼국시대 이래의 오랜 산성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탐방객에게 속살을 허락하지 않았다. 산성 답사는 참담한 실패였다. 날씨가 흐려 땡볕이 아니고, 비가 내리지 않는데 감사해야 했다.

지역 문화 관광 안내도에도 전혀 표시가 없었다. 안내도는 일영, 장흥 유원지와 조소앙 기념관을 크게 내세우고, 그밖에 온갖 체험학습장으로 도배돼 있었다. 고기 구워 먹고 물장난하는 유원지와 우리 사회의 이념적 관용의 폭을 되살펴 보게 하는 조소앙 기념관이 서로 어울리는 주말 관광지라는데 동의할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 관광 문화의 수준이 인문학과는 먼 양극단 어디라는 점에서 한탄하게 된다. 역사와 문화에 조금 관심을 둔다면, 양주 관광안내 가이드북에도 중종의 원비 온릉(溫陵)과 백수현 고택, 대모산성, 권율 장군 묘소 등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대모산성은 물론, 관리 보전을 위해 경기도가 올해 11억 예산을 배정한 백수현 고택조차 언급도 없다. ‘시간을 산책하다’는 캐치프레이즈라도 달지 말지.

오늘의 주제인 양주 대모산성을 주민도 모르고 외지인도 찾지 않게 된 것은, 공무원들의 책임도 있지만 언론과 학자들 책임이 더 크다. 입만 벌리면 인문학 운운하고 역사와 문화 운운하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의무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지원서를 쓸 때만 역사와 문화의 대중화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일단 지원이 확정되면 태도가 달라진다.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진실을 가리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무엇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문성을 내세워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저의는 없었는지 반성할 일이다. 사실 수원 화성도 남한산성도 한국의 서원도, 왕릉들도 전문가들이 독점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중이 자주 찾고 세계인에게 내놓고 보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거다. 대모산성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있나?

대모산성:산성의 높이는 4~5m, 폭은 6~8m. 전체 1천400m 가운데 세 군데 70~80m 정도만 보존 상태가 좋다. 본벽 바깥에 경사지게 벽을 더 쌓아 본벽을 강화한 보축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남아있는 구간의 성벽은 아주 단단하게 잘 쌓여 있다.

양주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데다가, 남북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흐르니, 너른 평야에 넉넉한 물과 수운을 갖춰 예로부터 필쟁의 요처였다. 단양 적성산성이나 온달산성과 마찬가지로, 삼국 시대 초에는 백제가 먼저 양주 일대를 차지하고 고구려를 위협했다. 5세기 말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주인이 된 고구려가 군사 시설을 만들고 매성(買城)이라고 불렀다. ‘맷골’ 혹은 ‘물골’, 물의 땅이라는 뜻이다. 대모산성(大母山城)의 축성도 이즈음이다.

산성은 정상 면적은 1,653㎡이고 둘레 1.4㎞에, 높이 4∼5m, 너비 6~8m다. 대체로 무너지고, 3군데 70∼80m 성벽만 보존 상태가 좋은데, 성벽과 현문(懸門) 등에 첫 축성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성벽은 바깥면이 장방형이 되도록 가공된 할석을 수평 고임하고, 성벽 바깥쪽 아래에 느슨한 기울기의 벽체를 더 쌓아 중간쯤에서 본성벽에 닿으면서, 전체적으로 경사를 이룬다. 발굴된 북문과 남동문 모두 바깥 계곡을 향해 단절된 현문(懸門)이라 이채롭고, 문짝을 들어 올릴 때 지탱하는 반원모양의 축수(軸受)가 박혀 있었다.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자락. 분단 시대의 상흔인 군 부대가 쓰던 빈 참호다.

성 안에서 건물터 4, 우물터 5, 창고터 1곳이 발견되고, ‘德部(덕부)·德部舍(덕부사)·官(관)·草(초)·富部(부부)·大浮雲寺(대부운사)·城(성)’ 등 귀한 명문(銘文) 기와조각도 출토되었으니, 큰 관아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금속 유물만 600점이나 발굴됐는데, 거울·말·팔찌·도장 등 청동제품이 확인돼 최고위급 인사가 가족과 함께 머문 흔적으로 보인다. 말 모양 토우(土偶), 그릇, 활촉과 쇠낫·도끼·투겁창·말재갈·솥·쇠보습 등의 유물로 미루어 관할 지역이 농업·수공업 생산력도 가늠할 수 있으니, 방어와 행정, 물류 중심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한 듯하다. 개원통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를 딴 금속 화폐니,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기에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는 증거다.

대모산성은 최종적으로는 신라 땅이 된다. 1970년대 한때 신라가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보기(步騎) 연합군 20만을 격파하고 3국 통일을 완수한 ‘매소산성’ 자리로 추정되면서, 대모산성 발굴 상황을 대통령이 챙긴 적도 있었다. 문무왕 때인 675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이끄는 당나라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군마 3만 필을 노획한 매초성(買肖城) 전투가 양주 지역에서 벌어졌다는 건데, 요즈음 학계에서는 연천 대전리 산성이 매초성이라고 본다.

세월이 흘러 조선조에 접어들면, 태조 이성계가 태종 이방원의 반란을 용서하지 않고 양주 회암사에 머물렀으며, 영의정, 좌우의정등 최고위 관료들이 머물며 정사를 돌보던 곳의 지명이 의정부가 됐다. 임꺽정과 방랑시인 김병연이 양주를 무대로 활동했고, 임진왜란 때도 양주 게너미고개[蟹踰嶺]에서 부원수 신각(申恪)이 육지 전투로는 최초로 승리했으며, 21세기에도 효순이 미선이 두 여중생의 참사 등 양주 이야기는 끝이 없다.

청동도장: 귀한 소재인 청동으로 만든 도장이 출토됐는데, 전서체 명문(銘文)도 인식되었다. 황룡사지 출토 동인(銅印)과 서체 일부가 동일하고, 새겨진 글자는 ‘□玄村縣之印’이었다. 신라 지배를 받았고 지명은 ‘□玄村縣’이었다는 의미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