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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성곽과 능원] 3. 남한산성

‘병자호란’ 치욕의 역사 현장… 무능한 조선이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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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장대(守禦將臺) / 병자호란 때 인조 이종이 직접 군사를 지휘독려한 곳. 동서남북 네 장대 중 으뜸이며 유일하게 남은 서장대(西將臺). 산성에서 가장 높은 일장산(日長山) 정상이라 날씨 좋은 날은 멀리 인천 낙조까지 조망할 수 있다. 원래 단층을 후에 영조가 2층을 올리고 바깥에 수어장대, 안에 무망루 편액을 걸었다. 무망루(無忘樓), 인조의 항복과 효종의 볼모 생활을 잊지 말자. 영조는 여주 영릉(寧陵, 효종릉)을 참배하고 돌아올 때 여기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치욕을 되새겼다고 한다.

역사를 한두 사건이나 한두 인물의 이야기로 단순화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이나 인물은 있는 법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역시 병자호란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시 중국 대륙은 농경국가인 한족의 명(明)에서 유목민족인 여진의 청(淸)으로 주인이 바뀌고, 일본은 140년 전국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 정치가 시작한 직후였다. 조선은 건국 200년을 지나면서 사화와 당쟁, 잦은 반정과 역모 조작 사건,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중국, 일본은 청년 국가인데, 조선만 말기 국가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지도자의 차이도 컸다. 청나라는 태조 누루하치, 태종 홍타이지, 섭정 도르곤 3대에 걸쳐 영웅이 집권하지만, 조선은 무능할수록 왕위에 더 가까웠다. 연산부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를 거쳐 인조까지 광해군 외에는 대부분 방탕하거나 병약했고, 아니면 의심증후군에 우유부단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역량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황위를 계승한 명민한 황제였지만, 인조 이종(李倧)은 서인의 반란에 얹혀 왕위에 오른 발언권 없는 우둔한 왕이었다. 국가와 지도자 모두 뒤지니 전쟁 전에 이미 승부가 나 있었다.

홍타이지는 중원 전쟁을 지원할 3만 병력과 전마 3천 필 요구가 거부당하자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군은 한양으로 직진하는 청군의 후미를 교란하지도 않았고, 조선 조정은 강화 몽진도 늦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은 남한산성에 비축된 양식이 바닥난 50일 만이었다. 한반도의 대륙군에 대한 항쟁 기간은 점점 짧아진다. 기원전 2세기 고조선은 한나라군에 2년을 버티고, 고구려는 수, 당과 200년 간 항쟁해 대부분 이겼고, 7세기 백제는 임존성을 근거로 4년간 부흥 운동을 펼쳤다. 8세기 통일신라는 당나라 10만 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문약하다고 평가된 고려조차 세계제국 몽골에 근 20여 년을 버텼는데, 전주 이씨의 17세기 조선은 변방국 청나라군에 두 달 못 돼 항복했다.

▲ 남문 / 본래 이름은 지화문(至和門). 장주 초석 위에 우뚝 선 문루에는, 초익공계 양식의 팔작지붕이 얹혔다. 중앙에 홍예문을 두고, 좌우로는 막돌 쌓기로 자연석을 평줄운에 맞춰 높이 쌓았다. 높은 성벽의 안전도를 고려해, 위로 올라가면서 석축면에 구배를 두어 점점 안으로 옥아들게 했다. 윗부분 여장(女墻)에 총안(銃眼)을 설치했다.

아들 소현세자를 의심한 인조

소설이든 연극이든, 영화든 명칭이 무엇이든 모든 드라마는 위기 상황에서 인간 군상이 드러내는 갈등 구조를 묘사함으로써 성립한다. 갈등이 심각할수록 극적 효과는 크다. 병자호란은 드라마 배경으로 최고다. 떠오르는 청과 기울어가는 명, 젊고 기민한 청과 늙고 느린 조선의 대비는 구조적 모순이다. 발언권 약한 왕과 목소리 높은 서인 조정, 주전파와 주화파는 조선 갈등의 큰 틀이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될수록 간신의 발호와 영웅의 비운은 더더욱 대비되니, 조선의 갈등은 더욱 복잡하면서 구체화된다. 무능한 부왕 인조와 명석한 장남 소현세자, 요사스런 총희(寵姬) 조 소용과 충직하나 경계 받는 세자빈 강빈, 중앙의 권간(權奸) 김자점 대 변방의 용장(勇將) 임경업. 그러나 조선은 갈등조차 모두 국운을 해치는 방향으로 해소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영민해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했고, 후궁 조 숙원(趙淑媛)은 이를 부추겨 소현세자 부부와 아들 삼형제를 모두 죽인다. 얼마 후에는 중앙의 권간 김자점이 변방의 용장 임경업을 죽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안타까운 이야기는 소설 ‘임경업전’으로 재구성됐다. 김자점과 임경업의 대비는, 중국 송나라의 간신 진회(秦檜)와 충신 악비(岳飛) 장군을 연상케 한다. 악비는 오늘날에도 관우와 함께 중국 민중의 절대적 숭앙을 받지만, 오늘날 조선조 임경업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너무나 허전하다.

그나마 효종 즉위후 김자점과 조 숙원이 역모를 꾀하다 죽는 반전이 있어 최소한의 위로를 준다. 호란 당시 주전파의 핵심 김상헌도 안동 김씨요, 청군의 밀정 노릇을 한 권간 김자점도 안동 김씨다. 같은 뿌리에서 나서 자랐다 해서 같은 줄기나 잎은 아니다.

▲ 남한산성의 암문(暗門) /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비상시 출입하고자 은밀하게 설치한 출입구이다. 적이 알지 못하게 병기, 식량 등 물자를 운반하고 적의 눈을 피해 구원을 요청하거나 원병을 받아들이는 통로다.

신라 문무왕 때 첫 축성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 온조왕 13년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 기록돼 있고, 택리지는 백제 온조왕의 고도라 소개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한산주의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비정된다. 광주산맥 주맥에 낮이 긴 산 일장산이 있고, 남한산성이 산 능선을 병풍처럼 둘렀다. 주봉인 해발 497.9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의 연주봉(467.6mm, 동의 만월봉(502m)과 벌봉(515m), 남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8㎞ 성벽을 쌓았다. 자연석 큰 돌을 아래, 작은 돌을 위에 얹은 석성이다. 바깥은 경사가 급한데 안은 완만해, 적의 접근은 어려우나 방어와 농성에 유리하다. 봉암(蜂巖), 한봉(漢峰), 신남(新南) 등 외성 셋과 옹성 다섯이 연결되어 하나가 뚫려도 다음 방어망이 기다린다.

원성 성벽의 안쪽 둘레는 6천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천295보로 20리 95보며, 동서남북 4대문과 4장대를 세우고 옹성과 치성 각 5곳, 포루 7개, 암문(暗門) 16개를 냈다. 내부 면적은 15만 9천859평. 우물 80, 샘 45 등을 설치하고 매염처(埋鹽處), 매탄처(埋炭處)를 파서 소금과 숯을 비축했다. 안에 수어청을 두고 행궁 73칸, 하궐 154칸 합해 궁궐 227칸을 짓고, 종묘 건물로 사용할 좌전(左殿), 사직을 옮길 우실(右室), 객관(客館)인 인화관(人和館)도 갖추었다. 관아를 앉히고, 창고를 들였는데, 지금 남은 건물은 동ㆍ남문과 서장대(將臺), 지수당, 몇 안 된다. 4대문과 수어장대를 비롯한 남한산성 일대는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행궁(行宮) /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別宮).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행궁은 지방순행 시 처소로 또는 전란시 피난처로 사용됐다. 숙종 이순이 임시 행정 수도로 쓰기 위해 남한산성 역사(役事)를 일으킨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김구철 시민기자(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