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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37. 일제의 심장을 겨냥하다,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 류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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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류만수(柳萬秀,1923~1975)는 안성군 금강면 개산리에서 태어났다. 소작농이던 그의 부친이 철도 공사판에 나갔다가 사고로 발을 다쳐 공사판에서 쫓겨나면서 소작마저 부칠 수 없어 고향을 떠나야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소년 류만수는 한성공업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공장에 나갔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일제는 똑똑하고 유능한 조선인을 원하지 않았다. 조국의 독립 없이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청년 류만수는 독립투쟁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신만고 끝에 만주에 도착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립군을 만날 수 없었다. 일제의 폭압으로 무장단체들이 중국 내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기 때문이다. 반년을 만주에서 보내고 귀국하면서 다짐했다. ‘국내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일을 벌이자’ 집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았지만 혼자서는 일을 벌일 수가 없었다. 1943년 류만수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가와자키[川崎]의 일본강관주식회사에 훈련공으로 취업했다. 회사 기숙사에서 21세의 류만수는 17세의 소년 조문기와 한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조문기는 항일의식이 뚜렷한 당찬 소년으로 바로 의기투합하여 동지가 되었다.

▲부민관 폭파 의거 터 표지판

■ 1944년 5월 일본강관 파업을 일으키다

회사에서 회사 간부가 쓴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를 훈련공들에게 보급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이 황당했다. ‘훈련공들은 밥만 많이 먹는다, 농땡이를 잘 부린다, 싸움질을 잘 한다’ 등 모욕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 책자는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류만수는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몇몇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일을 방치하면 모욕과 차별이 뒤따를 것이다. 조선 청년들은 멍청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류만수는 이들에게 조문기와 작성한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날 밤 대표자 회의를 거쳐 각 방마다 회의가 열렸다. 조선인을 멸시하는 책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공부를 시켜준다며 속여서 군수공장에 불러들인 일제에 대한 분노가 기름이 되었다. 다음날 3천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식당에 모여 구호를 외쳤다. “훈련공 대우를 개선하라!”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류만수와 조문기는 전날 밤에 짐을 챙겨 기숙사를 빠져나와 미리 준비해둔 노무자 숙소로 숨었다. 이 시기에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다. 류만수는 조문기와 짐을 나르는 힘든 노동을 하며 한동안 숨어 지냈다. 이때 류만수는 일본에서 조선인노동운동을 지도했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서상한(1901~1967)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944년 11월 류만수는 귀국을 결정했다. “조선에 가서 민족을 배반한 친일거두와 침략의 원흉을 처단해서 우리 민족을 긍지를 되찾자.” 류만수는 함께 하기로 한 조문기와 귀국 이후의 세부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단체 구성하고, 친일 거두와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다음 중국으로 망명한다는 계획이다. 서상한의 도움으로 도항증을 마련한 두 사람은 귀국선에 올랐다.

 

■ 애청을 결성하다

1945년 3월 초, 서울 관수동 류만수의 집에서 조문기, 강윤국, 우동학, 권준, 박호영까지 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애청)을 결성했다. 이들은 모두 유만수의 지인들이었다. 류만수가 임시의장이 되었다. 모임 장소도 당분간 류만수의 집으로 결정했다. 애청의 목적과 행동지침은 류만수와 조문기가 준비한 초안대로 결정했다. 애청의 첫 사업은 친일 거두 3명과 총독부 인사 3명의 처단이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을 앞장 서 죽인 살인마 박춘금, 군수품을 상납하는 화신재벌 박흥식,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고 죽인 대가로 중추원 참의가 된 고등경찰 김석태를 골랐다. 정보 수집은 강윤국, 박호영, 권준이 맡았다. 거사에 쓰일 무기는 다이너마이트와 권총으로 결정했다.

박춘금의 특별한 움직임을 탐지한 류만수가 전보를 쳐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명월관에서 대의당을 결성한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대의당에 참여하는 자는 박춘금, 이성근, 김동환, 고원훈, 손영목 등 일제에 충성경쟁을 벌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대회까지 아무런 무기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당 결성 이후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류만수는 수색 변전소 작업장의 인부로 취업하여 현장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20여일이 지나자 현장감독이 류만수를 불렀다. “자네 발파경험이 있다고 들었네.” “예,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실습을 거쳐 발파작업을 맡게 된 류만수는 지하에 들어가 발파작업을 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분해해 떡처럼 뭉쳐져 있는 내용물을 조금씩 떼 내 운동화 밑창에 넣었다. 10여일 빼돌리고 뇌관 2개도 빼냈다. 한편 강윤국은 만취한 헌병 장교가 옷을 벗어 놓고 씻는 사이에 권총 한 자루를 빼냈다. 1945년 7월21일, 다시 관수동 류만수가 작전을 개시를 선언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소. 3일 후에 박춘근이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니 이 대회를 저지합시다.” 회의 끝에 류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사람이 이번 거사에 나서고 다른 동지들은 정보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다.

■ 친일부역자들의 소굴 부민관을 폭파하다

거사를 앞두고 강윤국이 장사동에 구한 하숙방에서 류만수를 비롯한 세 청년이 시한폭탄 제작에 골몰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사흘이었다. 당장 부닥친 문제는 심지였다.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꽃이 크게 일고 소리가 요란하여 발각될 위험이 높았다. 눈앞에서 타 들어가도 잘 보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타들어가는 심지가 필요했다. 이틀 동안 밤을 새웠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류만수가 탄성을 질렀다. “이젠 됐다!” 바싹 말린 명주실이 이런 조건에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마침내 목침 크기의 시한폭탄 두 개가 완성되었다. 시계를 보니 행사가 시작한 지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버렸다. 류만수와 조문기, 강윤국은 폭탄을 잡은 손을 상의를 벗어 가리고 태평로까지 내달렸다. 숨을 고르며 사람들로 꽉 들어찬 대회장에 들어섰다. 조선총독, 정무총감, 군사령관 등 침략의 원흉들과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부역자들, 그리고 중국과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온 친일대표들이 앉아 있었다. 세 청년은 대범하게도 행사 관계자처럼 단상으로 걸어 나가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무대 밑에 폭탄을 설치하고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정확히 3분이 지난 9시 9분 50초에 귀를 찢는 폭음이 연달아 들렸다. 대회는 엉망이 되었다. 다음 날 신문 사회면 구석에는 대회가 해산되었다는 단신이 실렸다. 그러나 서울은 어디를 가나 부민관 폭파사건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총독부는 곧바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을 총동원하여 범인 검거에 나섰다. 쌀 한 말에 10원하던 시절에 현상금이 5만원이었다. 일제는 요시찰 불령선인을 무작위로 연행했다. 고문에 못 이겨 내가 범인이라고 자백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류만수는 자신의 집에서 동지들과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 분단된 조국에서 굶어죽다

광복의 기쁨은 며칠 가지 못했다. 해방된 조국의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던 것이다. 남쪽을 점령한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시정부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 38선을 베고 죽겠다며 단선을 반대하던 백범 김구가 암살되었다. 유만수와 조문기는 사설 군사조직인 인민청년군을 조직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세력에게 겁을 주기 위한 군사조직이었다. 1948년 6월2일, 류만수와 조문기는 단선을 반대하는 행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을 당하고 1년 동안 징역을 살았다. 그 사이 대통령 이승만의 명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었다. 류만수는 해방 직후에 친일파들을 처단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류만수는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그마한 철공소에 취업했다. 그러나 류만수는 애청 동지들과 함께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사건’이라는 조작된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고문을 당했다. 사건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풀려나기는 했으나 건장하던 몸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럼에도 동지들을 챙겼다. 부산에서 지낼 때는 총각이던 동지 조문기에게 참한 처녀를 소개해 짝을 지워주기도 했다. 다시 서울에 왔으나 셋방조차 구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중랑교 다리 밑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공장에 다녔으나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다섯 아이들에게 밥도 제대로 먹이지 못할 때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입원조차 못하고 있을 때 동지 조문기가 나서면서 국립마산결핵병원에 입원하여 병을 치료하고 완치되었으나 3년이 지난 1975년에 류만수는 운명하고 말았다. 향년 53세. 조문기는 사람들이 류만수의 사인을 물으면 눈시울을 붉히며 “굶어 죽었소.”라고 했다. 부민관폭파사건의 주역들이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자 보훈처에서 신문에 광고까지 냈으나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조문기는 동지의 유족을 돕기 위해 대신 신청서를 썼다. 정부는 류만수 선생에게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