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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7. 경기 이천, 김좌근 고택

안동 김씨 세도의 흔적… 조선 초 권력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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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샛문으로 나와 뒤에서 본 별채. 팔작지붕의 곡선이 유려하다. 지붕마루에서 처마로 내려오는 곡선을 현대 수학에서는 ‘사이클로이드(cycloid)’라 하는데, 직선의 지붕보다 사이클로이드 지붕이 빗물이나 눈을 더 빠른 속도로 내려오게 한다고 한다. 한옥의 과학적 특성이 잘 발휘된 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포근한 이천 들녘 한가운데 길로 잠깐, 왼편으로 깔끔한 신축 양옥들이 이어진다. 길이 끝나는 안쪽 널찍한 터에 큼지막하고 단정한 고택이 두 채가 나타난다. 조선말 안동 김씨 세도를 대표하는 인물 김좌근 고택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살지 않았다. 그의 묘소를 관리하는 재사 겸 별채로 쓸 겸 양자 병기가 공력을 들여지었다. 이 집과 좌근-병기 부자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최근 영화 ‘명당’으로 꽤 알려졌다.

세도 정치에 참여한 안동 김씨들은 ‘안동’ 김씨라 불리지 않았다. 서울 ‘장동(壯洞)’에 몰려 살며 자신을 ‘장김(壯金)’이라 불렀다. 장동, 인왕산 동쪽 경복궁 서쪽으로, 조선시대에는 ‘장의동(藏義洞, 壯義洞)’ 혹은 ‘장동(壯金)’이라 불리던 오늘날 청운 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다. 왕자 시절의 태종 이방원, 효령대군, 안평대군 등이 살고 세종이 태어난 조선 초 권력의 산실이었다.

■ 옛 영화는 가고 주춧돌만 남아-누대의 청백리에 문장가 집안

이천 김좌근 고택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일자 집으로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웅장한데,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잘 다듬은 돌기둥으로 주추를 놓았다. 지붕에 학, 연꽃, 구름무늬를 누비고, 벽과 담장을 기하무늬로 꾸민 등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안채 뒤로 별채 겸 사랑을 차단하는 담과 샛문이 있다. 역시 팔작지붕으로 멋을 낸 별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오른쪽에 한 칸 내루를 달아냈다. 별채의 정제된 다양한 문살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집 전체가 웅장하고 어디 나무라기 어렵게 격조 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그렇다. 원래 99칸의 거택으로, 남아 있는 안채와 별채를 행랑채가 통째로 둘러싼 구조였는데,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안채와 별채만 남았다고 한다. 두 줄로 나란히 남은 잘 다듬어진 주춧돌이 전성기의 영화를 말해준다.

뒷담 너머로 본 안채 전경. 사람이 살지 않는데도 워낙 정갈해, 뒤에서도 흠 잡을 데 없다.

김좌근의 장동 김씨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노론의 명문이었다. 은진 송씨, 송시열, 송준길과는 급이 달랐다. 김상용, 척화신 김상헌 형제로 시작해 김수흥, 김수항 형제, 김창집의 6형제 등 누대에 걸쳐 청백리에 문장가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좌근의 아버지 조순은 노론이면서도 정조의 신임이 두터워 어린 순조를 맡긴다는 유지를 받은 규장각 각신이었다. 좌근은 누님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지원을 받아 장동 김씨 세도의 전성기를 누린다. 판서 4자리에 영의정만 세 번 역임했으니! 좌근은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에게 용돈을 챙겨주는 여유를 보여 대원군 집권 후에도 명예롭게 천수를 누렸고, 사후에도 왕릉 자리에 꼽히는 이집 뒤 명당에 묻혔다. (필자가 항상 이야기하지만, 명당을 찾아 그 집에 살거나 누울 수는 있지만, 복을 얻는 것은 후손이 얼마나 덕을 쌓느냐에 달렸다.)

별당의 창살. 머름이 받친 2개의 4분합문, 창살의 문양이 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비슷해 조화를 이룬다. 오늘날 새로 지은 한옥의 창살이 워낙 깔끔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로 잘 정제된 단아한 창살을 보기란 정말 쉽지않다. 고택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 국정 농단의 역사는 살아 있다-나합, 최순실, 그리고 오늘

좌근을 이야기하면서 ‘나합’ 이야기를 건너뛸 수 없다. 타고난 미모에 노래와 춤이 대단해 좌근의 총애가 이만저만 각별한 게 아니었단다. 좌근이 다른 여인 쳐다본다고 따귀 올리고, 그러면서 본인은 다른 남자를 불러들이기 일쑤. 여기까지는 프라이버시라 치더라도, 나라 곳간을 제 쌈짓돈 쓰듯 쓰고 시야를 가린다고 민가를 허물었다. 뇌물 받고 죄인을 꺼내주고 돈 받고 벼슬을 팔 지경이니, 삼정승에게나 붙이는 합하(閤下)로 불렸다.

뜻으로나 예우로나 요즘의 각하(閣下) 격인데, 아무리 세도 정승의 첩이라도 일개 기생 출신 천첩에게 ‘합하’는 과했다. 나주 출신이라 나합(羅閤)이라 했는데, 하루는 좌근이 ‘네가 세도를 부려 나합이라 불린다면서?’하고 첩을 경계하려 했더니, 첩의 임기응변이 대단하다. ‘나합이 전각 합(閤)이 아니라 조개 합(蛤)입니다.’ 세인들이 자신을 ‘나주 출신 조개’로 비하한다고 역공을 펼친 셈이다. 그 후부터 세간에 두 가지 버전의 나합이 돌았다 한다. ‘합하’와 ‘조개’. 최근 ‘각하’와 ‘가카새키’ 파문을 연상케 한다. 이 이야기는 한 말의 열사 황현의 ‘매천야록’과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에도 언급된다. 김삿갓 류의 한시 한 수가 재미나 여기 옮긴다. 뜻도 뜻이지만 독음이 음미할 가치가 있다.

후손들은 이 집과 주변 땅 10만 1천500㎡를 2009년 서울대학교에 기증했다. 친일 매국노들이 일제로부터 받은 땅을 돌려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명색 장관 지명자의 가족이 나랏빚을 128번이나 독촉받고도 뭉개는 세상에 장동 김씨 후손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주춧돌. 건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춧돌만 가지런히 남아있다. 원래 궁궐에서만 쓸 다듬은 돌 주춧돌이다. 주춧돌의 크기와 개수로 미루어 꽤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