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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균의 사할린 견문록] 5. 안톤 체홉의 발자취를 따라

이국서 불러본 망향가… 긴 세월 한인들의 그리움 전해지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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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늬보즈두흐

사할린의 마지막 밤이다. 막바지 인생을 살면서 느낀다. 모든 행선지 모든 여행지가 마지막일수도 있다는 생각. “다음에 또”라는 말은 공허한 허구임을 인식하고 산지 오래다. 맥주 바의 젊은 종업원은 한국의 여느 집 알바생과 똑같았다. 한인 3세 혹은 4세일 것이다. 단체 사진을 찍어주며 우리를 한바탕 웃겼다. 밝고 정감 있는 모습이어서 일행처럼 친숙한 분위기였다. 서툰 한국말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피의 흐름이 전해오는 듯했다.

이번엔 사할린의 주명수 화백이 한 곡조 뽑으신다. 러시아 노래인데 구슬퍼다. 그는 징용 온 아버지가 가끔 부르시던 한국 가요를 어렴풋 생각하며 촉촉한 눈망울을 붉히기도 했다. 가사는 잊었지만 멜로디를 기억해 내려고 이것저것 끄집어냈으나 우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 남인수나 고복수의 어떤 노래였지 않았을까. 문득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일잔 걸치고 돌아오시는 밤길에 부르시던 낙화유수가 떠올랐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그러고 보니 모두들 자기 가족과 고향이 관련된 노래를 은연 중 부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 화백의 아버지가 불렀을 노래야말로 마음을 적시는 진정한 망향가가 아니었을까 싶다. 집 떠나면 그리운 게 고향인가 보다. 하물며 젊은 청춘을 살아온 고국을 떠나 강제징용 온 한인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노래는 근본적으로 살아온 시대와 문화와 인간의 근본적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우리는 미색 중절모에 단추 두 개를 풀러 놓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펑퍼짐한 청바지를 차려입은 한인 2세 주명수 화백의 노래를 집중해서 들었다. 구릿빛 얼굴에 지그시 감은 눈, 우리는 그의 멋진 카리스마와 감회에 젖은 분위기에 마음껏 박수를 보냈다. 그는 외람되지만 백바지에 백구두를 신은 캬바레형, 또는 제비족 같기도 한 신파적이고 복고적인 멋을 풍겼다. 내일 우리는 주성용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아직 쉽사리 저물지 않는 푸르고 하얀 밤이다.

간밤이 잘 기억나질 않으나 옆방의 류 화백과 전 작가네 방으로 가서 준비 없는 해프닝에 엮여 무의식적 취중 객기를 발산했나 보다. 예술가들의 DNA는 정신적 파열과 복구를 거듭하는 태생적 습성을 버릴 수 없나 보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선다. 오늘은 유즈노 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역 한인강제이주희생자 합동묘비 참배를 한다. 묘역 입구 건너편에 한인 합동묘비가 잘 세워져 있었다.

“그대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기 묻혀 고요한 이들의 목소리에 가슴을 기울여라. 한국근대사를 점철하는 비극 가운데서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그 비극의 원형질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 사할린으로 끌려와 혹독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 땅에 버려져야 했던 이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신념을 끝내 잃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의 슬픈 역사가 여기 서려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살아남았다. 비운의 한걸음 걸음마다 고통은 켜를 이루었지만 통곡을 희망의 땀으로 풀씨처럼 떨어진 이곳을 가꾸며 뿌리를 내렸다. 고향에의 그리움을 가슴에 묻으며 내일을 살아갈 지식을 길렀다. 울지 말라 어제를 위해 흘릴 눈물은 없다. 역사에 짓눌리며 조국에 잊히고 시대에 뒤엉키며 살아온 세월의 장엄함이여 고난을 넘어 왕생한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가슴깊이 간직해온 고향주소를 차가운 빗물 속에 새기며 잠든 이름, 이름들. 민족사의 강줄기를 풀잎처럼 떠내려가며 온몸으로 살다간 이름을 기억하면서 여기 이 비를 세운다.” 한수산 짓다

대략 이런 내용의 묘비명을 우리의 전문 낭독자 시인 박설희님이 읽는 동안 모두들 엄숙해 졌다. 천천히 걸어가도 좋으련만 버스기사는 우리를 묘역의 중앙까지 태워줬다. 버스가 선 곳은 어이없게도 일본인 합동 묘역 앞이었다. 일본인들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강제 징용에 강제 노역시킨 한인들을 버려둔 채 저희들만 사할린을 떠나더니, 억울하게 죽어간 한인들은 방치하고 저희들만 신사를 방불케 하는 합동 묘역을 만들어 놓았다니. 울분이 치솟는다. 한인들의 묘지는 일본인 합동묘역 좌우 뒤편 숲 속 잡초에 묻혀 있었다.

경상북도 상주군 고 학생 김의문, 묘주 경오, 경기도 안성군 수원 진리 종말, 고 학생 조재옥, 경상북도 월성군 천북면 동산리 박봉찬, 전북 임실군 계면 산수리 경주 김공 윤식 지묘.

한인 2세들이 부모님들의 어렴풋한 주소를 묘비에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모두가 정확해 보이지도 않았다. <안성군 수원 진리> 라고 한 것을 보면 2세들이 정확히 부친이 전해온 고향을 기억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상이 가지 않는 폐허 속의 공동묘지다. 거대한 머윗대와 이름 모를 노란 야생화가 무덤을 덮고 있었다. 참으로 슬픈 광경이다. 묘지마다 묘주가 적혀 있었지만 돌볼 사람이 점점 사라짐도 짐작할 수 있었다. 2세,3세,4세, 대를 내려가면 점점 1세들의 기억은 관심 밖으로 사라지리라. 쓸쓸한 묘지에 야생화 한 송이 바치고 돌아선다.

사할린이미지

고르늬보즈두흐 전망대는 ‘산 공기’를 의미하는 해발 600m가 넘는 곳이다. 헐벗고 다듬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나 케이블카로 정상에 올랐을 때 유즈노 사할린스크가 잘 보이는 확 트인 곳이었다. 정상에서 조금 더 걸으니 뒤쪽으로 높은 산들이 운무에 휩싸여 있어 마치 고산에 온 듯 아름다웠다. 좌측 언덕을 따라가자 스키장으로 사용하는 제법 가파른 슬로프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 산을 배경으로 가능한 모든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자신의 외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순간적이고도 영원한 기록의 리얼리즘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공유성이 없다면 스스로 피사체가 되는 것이 불필요하고 부질없는 행위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인, 그래서 남루한 표정도 자의적 합류가 불가피한 경우이지만 말이다. 산마루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 이외의 맛과 멋이 있고 고루한 낭만이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올 때 이덕규 시인이 갑자기 <개마고원에 가서 머루 빛 눈동자에삼단 같은 머릿결을 한 북한처녀랑 귀리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고 하여 한바탕 웃었다. 나는 답례로 <벌어진 산딸기 같은 입술을 한 묘향산 처녀>는 어떠냐고 했더니 모두가 입을 털어 막고 낄낄댄다. 조금 느끼했나?

버스는 러시아가 자랑하는 안톤 체홉의 책 박물관으로 간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이 ‘사할린 섬’(1895)이라는 책을 집필하며 3개월간 지낸 여정을 담은 박물관인 셈이다. 사할린은 19세기 말부터 죄수들의 유배지였는데 체홉은 직접 감옥에 까지 들어가 죄수들의 삶을 체험했다고 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체험과 경험에 의해서 예술적 영감을 받고 직관적 작위에 몰입하는 게 아닐까. 물랑루즈의 화가 로트렉처럼. 사실주의 작가 체홉을 생각하면 알랭드 보통이 ”미술(예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라고 한 것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체홉은 굶주리며 철길을 만들고 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하는 노동자들과, 원주민과 조선인의 역사까지, 마치 문학가이자 인류학자로서 의학기록서까지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할린의 여러 도시들은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과 극장, 거리 축제, 공원연극제 등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 마치 쿠바의 헤밍웨이 모뉴먼트를 연상케 한다. 이곳의 2층은 러시아 클레믈린 궁의 왕과 왕비 등이 애장하였던 보석과 장신구들이 전시돼 있었다. 화려한 각종 보석에 잠시 피로감이 왔다. 마치 아내와 함께 쇼핑센터를 갔을 때처럼. 다시 사할린 향토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1896년 사할린의 첫 박물관이었으나 1937년 일본이 점령하여 카이츠카 요시오라 라는 일본 건축가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안톤 체홉

이해균 수원민족미술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