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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3. 대전 회덕 동춘당(同春堂)

살아있는 봄과 같아라… ‘공간 미학’ 뽐내는 은진 송씨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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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종택 사랑채 / 정면 6칸에 왼쪽 끝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간이 달렸다. 기둥마다 주련이 달렸는데, 초서 글씨에 색깔까지 바래 해독하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다.

접근성과 희소성은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다. 인간은 천성이 간사해 쉽게 접근하면 귀한 줄 모른다. 한편, 인간은 천성이 게을러 접근하기 어려우면 알려 들지 않고, 귀한 줄도 모른다. 이래저래 인간은 귀한 줄 모르고 산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회덕 동춘당이 딱 그렇다.

대전시 대덕구 도심 한복판, 접근성은 더할 수 없이 높다. 그러나 동춘당 선생의 학덕은 범접하기 어렵다. 건물 동춘당은 접근성이 높아 귀한 줄 모르고, 인물 동춘당은 접근하기 어려워 역시 귀한 줄 모른다. 아, 건물도 사람도 동춘당이니 헷갈리기 십상이니 건물은 그냥 동춘당, 인물은 선생이라 칭하자. 회덕의 은진 송씨 종택은 선생의 5대조 송요년(宋遙年)이 15세기 후반 처음 짓고, 현재는 1835년 마지막 중건된 모습이다.

송씨 집안에 시집온 안동 김씨 아호 호연재(浩然齋) 의 시비/ 시제는 ‘야음(夜吟)’, ‘밤에 읊다’. 7천율시인데, 일부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삶이란 석 자의 시린 칼인데 / 마음은 한 점 등불이어라 / 서러워라 한 해는 또 저물고 / 흰머리에 나이만 더하는구나’ 야음은 여성이 밤에 읊은 시라기에는 너무 비장하고, 호연재는 여성의 아호라기에는 너무 호탕하다.

송요년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71살로 장수하는데, 51살에 사위 강귀순과 함께 대과에 급제하는 것을 보면 좋게 말해 의지가 강하고 나쁘게 보면 옹고집이었던 듯하다. 종택은 안쪽 깊이, 충청에서 보기 드문 ‘ㄷ’ 자형 안채, 바깥에 ‘ㅡ’ 자형 사랑채를 배치하고 담장으로 연결해 전체는 튼 ‘ㅁ’자 모양이 되었다. 정면 6칸의 사랑채는 큰사랑과 작은 사랑에 별도의 마루방이 붙었고, 안채 서쪽 날개채는 안방과 부엌, 마루 등이 겹쳐진 양통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이 있어, 안내판에 따르면 공간을 ‘절묘하게’ 분리했다. 안쪽 높은 곳에 ‘宋氏家廟’ 현판이 붙은 사당이 2개 있는데, 불천위 별묘를 위에 모시고, 일반 가묘는 약간 비껴 내렸다.

■ 동춘(同春), 살아있는 봄과 같아라

동춘당은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스스로 공부하면 손님을 맞고, 한편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강학 공간이다. 낮은 기단 위에 사각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고 정면 3칸의 자그마란 겹집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네 칸 마루와 두 칸 방은 사이의 분합을 들어 올리면 통으로 쓸 수 있다. 바깥에는 난간 없는 장마루를 두르고, 영쌍장을 달았는데 툇마루 쪽은 민가에 보기 드문 삼중 창호다. 온돌방 부분은 상류계층 집에서만 보이는 머름을 댔고, 대청 앞 띠살문은 여름에 활짝 열 수 있다. 현판은 선생의 평생동지요 친구며 가까운 친척인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송시열은 물론,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 김창흡 부자 등 당대 날리던 명사가 남긴 방문기가 동춘당 안에 걸려 있다.

소대헌 사랑채/ 사진 왼쪽이 정면 5칸의 큰사랑, 오른쪽 일부만 나온 건물이 정면 7칸의 작은사랑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잘다듬은 돌로 주초를 놓았다. 가운데 장대석 계단을 오르면 안채로 통하는 대문이다.

선생은 일찍이 19살에 생원과 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서도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단 두 권,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그러나 병조판서로 효종의 북벌론(비현실적인 허망한 꿈이었지만)을 추진하고,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좨주(祭酒), 이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쳐 사후에는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의 1인이 된다.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본인의 처신이 ‘동춘(同春)’, 봄과 같이 온유하고 겸허했다. 노론의 영수 우암을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남인과 소론에 대한 악형에 한결같이 반대하고, 여러 차례 우암과 소론의 영수 윤선거의 화해를 시도했다.

■ 어느 시대든 네트워크는 중요하다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했다. 우암과는 집안의 척분도 있었지만, 할머니끼리 자매간이라 진외(陳外家, 아버지 외가) 6촌간이라 어릴 때부터 항상 붙어다녔다. 또 예학의 정맥 사계(沙溪) 김장생이 선생의 외조부 김은휘(金殷輝)의 친조카니, 선생과는 외종숙인 인연으로 일찍부터 사계의 문하에 들었다. 아버지 송이창의 외조부가 병조판서를 지낸 이윤경에, 선생의 장인 정경세는 동인의 영수인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 처남댁은 회재 이언적의 증손녀였다. 언급된 인물 가운데 이언적,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송시열, 그리고 선생 본인까지 5분 모두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다. 오늘날로 치면 노벨상으로 인맥을 메운 셈인데, 참으로 어마어마한 네트워크다.

동춘당(同春堂) 보물 209호/ 크지 않고 아담해 선생의 겸허한 자세를 보여준다. 문제는 영어 번역 Treasure인데, 얼른 보면 그럴싸하지만, 전혀 아니다. 문화재 가운데 보물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개인의 보물이나 가문의 보물이 아니라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니 National Treasure라 해야 맞다. 굳이 국보와 구별하려면 ‘National Treasure’ 1급, 2급으로 구분할 일이다.

여기까지는 가문의 선택이었는데, 선생의 인맥에 방점을 찍은 것은 선생의 안목이었다. 제자 가운데 가려 사위로 삼은 민유중이 낳은 딸이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가 되고, 선생은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가 된다. 그리고 공조판서가 되는 외손 민진후의 5대손에 명성황후가 탄생한다. 선생의 증조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대과 급제의 기록은 없다. 실력에 비해 시험 운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과 급제 않고도, 살아 현달하고 죽어 명예롭고 자손 번창한다면 또한 본받을 만하지 않을까?

동춘당을 나와 동쪽으로 걸음 하면 시비가 하나 서 있다. 송씨 가문에 시집온 안동 김씨의 시비인데, 아호가 호연재(浩然齋)다. 남녀의 차별이 극심한 조선 후기, 얼마나 답답했으면 여류 시인은 스스로를 호연재라 불렀을까? 몇 걸음 더 가면 당호도 재미난, 소대헌(小大軒) 고택이 나온다. 선생의 둘째 손자 송병하 때부터 분가해 자손들이 살아온 집이다. 왼쪽에 큰사랑, 오른쪽에 7칸 작은사랑이 나란히 서 있는 재미난 배치다. 작은사랑 왼쪽 끝에 안채로 통하는 문이 달렸다.

 

동춘당 내부/ 방과 마루는 분합을 들어 올리면 전체를 통으로 쓸 수 있게 돼 있다. 건너편 벽 쌍창 아래 머름이 눈에 들어온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