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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9. 우리 역사상 최고(最古) 무예서‘무예제보(武藝諸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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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7일 『무예도보통지』는 제13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회의 심사를 거쳐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올랐다. 오늘날 태권도의 원류와 책안에 그려진 그림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추진하여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기록유산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우리 역사의 쾌거이기도 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는 그동안 체육사나 무예사에 있어서 더 나아가 국방사에 있어서까지 반드시 이해되어야하는 필수적인 저서로 알려져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이덕무, 박제가가 고증과 글쓰기를 하고 당대 최고의 무사인 백동수가 시연을 하여 1790년에 펴낸 무예서이다. 저자들과 시연자에 대한 명백한 기록이 있음에도 『무예도보통지』 및 관련된 사료에 김홍도가 ‘도보(圖譜)’의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북한이 김홍도가 그림을 그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증명된 사실이 아닌데, 이렇게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 작성에 김홍도를 확정하여 신청한 것은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측면에서 남북 화해의 시대에 접어든 시기이니 북한은 김홍도가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을 그렸다는 근거를 제시해주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 무예도보통지와 무예신보

사실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가 1759년에 간행한 『무예신보(武藝新譜, 무예신식(武藝新式)이라고도 불림)의 18기를 근간으로 해서 만들었다. 사도세자의 『무예신보』는 1598년에 간행된 『무예제보』를 근간으로 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훈련도감을 설치한 조정은 군사를 육성하기 위해 새로운 무예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의 위력적인 검술 앞에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들은 위축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훈련도감 낭청인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왜구를 물리친 경험을 토대로 편찬된 명나라의 병서 『기효신서』에 나오는 곤봉 등 6가지 무예를 골라 자세와 동작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풀이한 무예서를 만들고 이름을 『무예제보』로 지었다. 그러니 우리 『무예도보통지』의 원류는 곧 『무예제보』인 것이다.

그러나 『무예제보』는 한말 국내 사정과 서구의 침투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무예제보』가 프랑스 파리 동양어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조선 무예서의 원류인 『무예제보』 초간본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프랑스 국립파리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무예제보』는 숙종대 재간행된 판본인데, 2017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 『무예제보』는 1598년 초간본이다. 이는 한국 무예사 연구와 서지사(書誌史)에 있어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수원화성박물관이 경기도에 있으니 무예제보는 경기도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예제보의 무예

조선 최초의 무예서 『무예제보』 는 한명회의 5대손인 한교(韓嶠)에 의해 1598년(선조31) 10월에 간행되었다. 무예제보는 최초의 본격적인 무예서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정립된 절강병법(浙江兵法)의 우수성을 인지하고 이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무기와 병법이 조선군에 적용하게 되는데 무예제보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산물이다. 즉 기존의 병법을 새로운 병법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전까지 경시되던 단병(短兵), 곧 창과 검을 다루는 살수(殺手)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무예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단병무예(短兵武藝)인 등패, 장창, 당파, 낭선, 곤봉, 쌍수도를 골라서 제(製)는 곡식(曲式),해(解)는 설(說), 습법(習法)은 제도(譜圖)로 고쳐서 편찬한 것이다.

그동안 『무예제보』의 경우 국내에는 원본의 존재유무가 알려져 있지 않고 유실되었다고 추정하였으며, 대략적인 내용은 『무예도보통지(武藝面譜通志)』의 ‘원(原)’ 또는 증(增)’이란 표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 기효신서와 무예제보

한양을 수복한 선조는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만들고 도제조에 유성룡, 대장에 조경, 실무를 책임지는 유사당상에 병조판서 이덕형을 임명하여 군사들을 모집하여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사수(射手)는 활쏘기를 잘 하는 병사이고, 포수(砲手)는 총과 대포를 쏘는 병사, 그리고 살수(殺手)는 창검을 잘 쓰는 병사였다. 당시 사수보다 포수와 살수의 양성에 치중하였다. 이에 따라 거리의 아동들까지 포수, 살수의 무예를 놀이로 삼게 되었으며, 끝내는 ‘아동대’까지 편성되어 군사훈련을 받기에 이르렀다. 훈련도감은 선조 27년(1594) 2월에는 독립 군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무렵부터 한교는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무예 중 특히 살수에 관한 내용을 번역하는데 주력하였다. 『무예제보』의 ‘기예질의’에 한교가 명나라 장수 허유격과 무예의 요체에 대해 질문하고 그 답을 얻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허유격은 무예의 요체는 “첫째 담력, 둘째 힘, 셋째 정예함, 넷째 빠름”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한교는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무예의 요체와 수련에 대해 논의 하고, 명나라의 『살수제보(殺手諸譜)』를 번역하였다.

평양성 탈환 직후 명나라 군대의 막사를 찾은 선조는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투에서 승리한 비결은 척계광의 『기효신서』의 전법을 따랐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선조는 역관들에게 상급을 내려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구해 유성룡에게 전면서 번역하도록 지시하였다.

한교는 살수제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유성룡은 나라가 위급하니 한교가 비록 상(喪)을 당했다 하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하여 『살수제보』의 번역과 함께 『기효신서』의 내용 중에도 미비점이나 난해한 부분을 명나라 장수들의 의견을 물어 명확히 해석하도록 하였다. 이는 특히 선조가 『기효신서』가 매우 높은 효율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교는 검법을 비롯한 무예의 여러 동작이 서로 연결되는 내용에 대한 해설서가 없었기 때문에 명나라 진중에 가서 명군들의 훈련을 관찰하거나 질문으로 의문점을 풀어갔다.

『무예제보』는 전쟁 중 시급하게 간행된 무예서로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곤(棍), 등패(?牌), 낭선(狼?), 장창(長槍), 당파(??), 장도(長刀)의 6기의 무예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중국 장도의 기원은 일본에 두고 있다. 장도는 왜구의 장도이며,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에 도입되면서 쌍수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무예제보』는 단순히 중국의 병서를 베낀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진화되었다. 첫째, 무예의 흐름을 정해 차례로 자세를 익힐 수 있도록 편집한 것이다. 둘째, 명나라 장수들조차 잃어버린 장창 12세법을 ‘후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일이다. 셋째, 동작을 풀이한 보를 한글로 언해하여 한문을 잘 모르는 일반 병사들도 책을 볼 수 있도록 편찬했다는 사실이다. 자세와 동작을 한글로 풀이하는 전통은 『무예신보』를 거처 『무예도보통지』까지 이어졌다.

○ 무예제보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1982년 한불협정에 의하여 프랑스에 있는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헌들을 들여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립 파리 동양어학교 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마이크로필름으로 복사하여 국내에 전해지면서 무예제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의 도움으로 국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던 무예제보가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무예제보』를 소장한 수원화성박물관은 곧바로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하였고, 아마도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곧바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무예제보』는 훈민정음해례본, 불조직지심체요절과 같은 전 세계 최고의 기록유산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김준혁(한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