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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8.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극락세계 ‘安養’을 위해… 1천200년 동안 자리를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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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 당간 사이로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 삼층석탑이 보인다.
우리는 가끔 고찰이나 폐사지에서 우뚝 솟은 돌기둥을 만나게 된다. 당간지주라 불리는 이 돌기둥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걸어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장대[竿]를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당’은 주로 비단 같은 천으로 만들고 ‘간’은 무쇠나 청동 또는 나무로 만든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당간지주가 여럿 남아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간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안성 칠장사 철당간을 비롯하여 8기이며, 당간지주는 남북한에 100여 기 가량 남아 있다.

 

안양시 예술공원 입구에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中初寺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삼층석탑과 나란히 서 있다. 현재 이 일대에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절의 규모를 제대로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개울을 건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던 것과 당간지주가 서 있는 곳이 절 입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동서로 마주 서 있는 당간지주는 1천2백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켰다. 지면보다 약간 높게 단을 만들고 그 중심부에 세워진 당간지주를 보수하면서 바닥을 조사한 결과 크고 작은 잡석과 흙을 혼합하여 기초를 다진 것을 확인했다. 긴 사각형 돌을 남북으로 놓은 간대석 가운데 원좌와 지름 34센티미터와 깊이 15센티미터의 원공이 당간을 튼튼히 받쳐주었다. 지주는 높이에 비해 너비와 폭이 작아 가늘고 기다란 느낌을 주고 있으며, 정상부는 완만한 경사로 다듬었다. 외면 상부를 1단 낮게 깎은 지주의 장식 수법은 동시대 경주지역에 건립된 당간지주와 형식이 비슷하다. 이것은 8세기에서 9세기까지 건립된 당간지주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장식 수법이다. 참고로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와 많이 닮았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경내에 남아 있는 안양사지 주춧돌.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중·하의 세 곳에 간구멍을 뚫어 설치했다. 상부는 내면 상단에 장방형의 구멍을 마련하여 간을 장치했고, 중·하부는 관통한 둥근 구멍에 간을 설치하게 되었다. 동쪽 지주의 윗부분이 깨져 있는데, 해방 이후 인근 마을의 석수들이 석재로 사용하려다 생긴 자취라고 전해진다.

 

이 당간지주는 일제강점기 때에도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했던 것으로 광복 후 1963년에 보물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신라 흥덕왕 1년(826년)에 만들어진 이 당간지주가 특별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바로 두 개의 지주 가운데 서쪽 지주의 서쪽 면에 123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병오년 8월 6일 신축일에 중초사 동쪽 승악(僧岳: 삼성산의 신라 때 이름으로 추정)에서 돌 하나를 나누어 둘을 얻었다. 같은 달 28일에 두 무리가 시작하여, 9월 1일에 함께 이곳에 이르고,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절주통(節州統: 승려의 최고 직인 국통 다음의 지위)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이 명문을 통해 이 당간지주가 세워진 연대, 중초사라는 이 절의 이름, 경주 황룡사와의 관계,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라는 당대 신라의 유명한 승려를 알 수 있다. 덧붙여 당간기에는 신라식 속한문을 혼용한 곳이 있어 고대국어사 연구에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은, 현재 이 탑이 서 있는 곳에서 동북쪽 80미터 지점에 도굴된 채 무너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처음에 보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1997년에 재평가가 이루어져 경기유형문화재 제164호로 격하되었다.

 

■남북국 시대의 역사가 담긴 유적

유득공이 <발해사>에서 주장했던 대로 통일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잠시 이 시대의 불교역사를 살펴보면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역사적 의미가 좀 더 분명하게 살아날 것이다.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던 신라 불교는 8세기 후반부터 왕실권력과 더욱 밀착되었다.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여 왕실의 권위를 한껏 드러냈다. 불교예술은 절정을 이루었으나 불교는 지배계급과 밀착하여 사치와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골품제의 모순도 한계에 이르렀다.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세력이 몰락하면서 지방호족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지방호족이 성장하면서 이들의 지원 아래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禪宗)이 도입되었다. 선종은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무렵 <미륵하생경>에 근거한 미륵신앙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륵신앙은 사회악이 극한에 다다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낡은 삶을 버리고 모두의 이익과 안락을 지향하는 새 삶을 추구함으로써 비로소 미륵의 용화세계가 펼쳐진다고 믿는 신앙이다.

 

당나라는 몰려드는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에게 빈공과에 응시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812년에 처음 실시된 빈공과의 합격자 8할이 신라유학생이었다. 이 정도로 신라와 당은 가까웠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해동성국’으로 불렸던 발해가 신라보다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게 된다.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세워질 9세기 초반의 신라사회는 요동치고 있었다. 825년에는 고달산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반란세력과 연합하여 신라 왕조를 타도하려고 투쟁했으나 좌절하고 말았다. 826년에는 승려 도의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보림사에서 처음으로 선종을 전파했으며, 홍척은 남원 실상사에서 선종을 전파했다.

 

당간지주 완공된 해(827)를 기준으로 1년이 지난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장보고 장군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왕으로 이름을 떨치고, 증각대사가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했다. 6년이 지난 833년에는 대구 동화사에서도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가 제작되었다. 이처럼 중초사 당간지주가 제작되던 827년 전후에 선종이 시작되고, 실상사와 동화사 같은 대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보면 중초사도 이들 사찰에 못지않은 규모와 위상을 가졌을 것으로 진작된다. 그러나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같은 문헌에 중초사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일찍 폐사가 된 듯하다. 중초사를 이은 사찰이 안양사이다. 이곳에 안양사가 들어선 것은 900년이다.

 

▲ 박물관 건립을 할 때 수습한 안양사지 석물들
■ 안양시를 있게 한 안양사

안양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 6년(1406) “어가가 금주(衿州) 안양사 남교에 머물렀다.”라는 기사이다. 태종 11년(1411)에는 정종이 안양사에 거둥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태종 17년에는 안양사에서 수원 부사와 과천 현감이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를 보면 안양사는 한양의 근교에 위치한 사찰로서 왕과 양반사대부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세종 30년(1448)의 기사이다. 당시 세종은 궁궐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여 유학을 신봉하는 신하들과 마찰을 빚었다. 이때 신하들은 삼성산 안양사 터에 큰 절을 다시 창건한다는 소문을 전하며 세종에게 내불당의 철거를 요청했다. 내불당으로 인해 “안양사가 중건되고, 불법이 다시 일어날 것 같아 두렵다”는 이유였다.

 

광복 후 이 주변이 논밭으로 개간되어 오다 1950년대 말 유유산업 부지가 되어 건물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유유산업이 수도권기업 지방이전 정책에 따라 이전했다. 유유산업의 건물은 유명 건축가 김중업이 1950년대 후반에 설계한 것이다. 안양시는 이들 건물을 근대산업유산으로 활용해 부지 일대를 예술창작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때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중초사가 아니라 안양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여 이곳이 안양사 터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안양(安養)’이란 불교에서 아미타불이 주관하시는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안양사는 극락으로 인도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안양시는 안양사가 있는 도시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조에는 안양사에 대한 설명이 있다. “안양사는 삼성산에 있다. 절 남쪽에 고려태조(왕건)가 세운 7층 벽돌 탑이 있고 김부식이 지은 비문은 결락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이 자리에 본래 중초사가 있었으나 후삼국 시대(900)에는 안양사가 세워졌던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중초사지 당간지주에서 약 500여 미터 떨어진 바위에 한 동자승이 종 치는 모습을 담은 조각이 새겨져 있다. 마애종(磨崖鐘, 경기지방문화재 제29호)이다. 마애불이야 널려 있지만 마애종은 이것이 국내 유일한 것이다. 이 마애종도 중초사나 안양사와 관련이 깊은 유물임에 틀림없으니 빠트리지 말고 살펴볼 일이다.

 

신라의 중초사는 고려의 안양사를 거쳐 조선 중기에 폐사 되었다가 근세에 포도밭으로 활용되어 사람을 불러 모으다가, 유유산업 공장이 들어서면서 김중업의 건축물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 이 터가 예술공원으로 산뜻하게 변모하여 시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도 명당이 내린 축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당간을 바쳐주는 지름34센티미터, 깊이 15센티미터의 원공.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