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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25. 최고의 외교 전략가 서희

‘80만 거란군’ 홀로 물리친 역사상 가장 빛난 외교전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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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 부발읍 일원에 위치한 서희테마공원은 최고의 외교 전략가인 서희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시민과 학생들에게 그의 업적과 정신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는 우리 역사상 외교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던 서희(942~998)의 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36호다. 서희 묘역으로 가는 입구에는 서희의 신도비와 사적비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상두산(象頭山) 서희 묘역은 전체적으로 3단 층계식으로 되어 있어 고려시대 묘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묘소로 올라가는 첫 단은 네모진 공간이다. 두 번째 단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양쪽으로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무덤 앞에는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자리한다. 

맨 위 세 번째 단에는 서희의 묘와 부인 묘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으며 봉분 아래쪽은 2단 둘레 돌(護石, 능이나 묘의 봉토가 무너지지 않도록 봉토 아랫부분을 돌려 쌓는 돌)로 둘려 있다. 직사각형 모양의 쌍분 앞에는 각각 상석이 놓여 있고 쌍분 중앙에는 서희의 묘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묘비 1기가 1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서 있다.

 

서희는 942년 고려와 거란 간 만부교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해에 태어났다. 만부교 사건은 태조 왕건이 거란이 외교 사절로 보낸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 메어 두었다 모두 굶겨 죽게 했던 사건이다. 이로써 왕건은 거란과 적대적 관계를 분명히 밝혔다.

 

서희가 활동했던 10세기 동아시아 정세는 당(唐) 제국이 몰락한(907) 이후 파죽지세로 일어나 만주 일대를 장악한 거란과 중국 남방의 송(宋)나라(960)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936)가 각축전을 벌이는 형세였다. 거란은 송을 제압(991)하고 난 후 동아시아 최강의 패자로 등극했다.

 

거란의 다음 단계는 고려와 송의 관계를 사전에 차단하고 고려를 복속시키는 것이 외교적 과제였다. 고려 또한 서경 이북지역에 성을 쌓으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사민 정책으로 백성을 이주시켜 영토화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마침내 거란은 성종 12년(993) 10월에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이다. 두 나라 군사는 당시 동북아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인 압록강 하구에서 대치했다.

 

거란군의 선봉은 고려 서북방 봉산군을 이미 기습 점령하고 고려군의 선봉장인 윤서안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리고 항복을 요구했다. 그는 “대국 거란은 이미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 고려가 그 영토를 침범하므로 이에 정벌하러 온 것”이라며 “거란은 사방을 통일했는데 아직 복속하지 않는 자는 기어이 소탕할 것이니 속히 항복하라”고 말한 것(고려사 열전 서희전)으로 알려졌다. 고려 조정은 먼저 이몽전을 대표로 보내 거란 측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소손녕의 글을 본 서희는 80만 대군까지 이끌고 왔다면서 항복하라고 엄포만 놓는 소손녕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그 틈새를 노리고 있었다.

 

고려 성종은 조정 대신들을 소집해 국가안보전략회의를 주재했다. 적군이 우리 땅을 침략해 와서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재산과 생명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대신들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하자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만이 난무했다. 이에 성종은 할지론으로 결정한다. 

더불어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남은 쌀은 적의 식량으로 사용될까 두려우니 대동강에 모두 버리라고까지 지시한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서 이지백은 “한 사람의 충신도 없어서 갑자기 토지를 가벼이 적에게 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하며 할지론은 안된다고 임금에게 직언한다.

여주 산북면에 위치한 서희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거란군은 이몽전이 돌아간 후에 고려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자 안융진으로 진격한다. 안융진 수비대 책임자는 발해 출신 중랑장 대도수였다. 안융진 부대는 처절한 싸움 끝에 거란군을 패퇴시키고 만다. 

이때 서희는 성종에게 “우리 영토를 적에게 떼어주는 것은 만세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적과 더불어 한번 싸우게 한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며 항복론도 아니고 할지론도 아닌 먼저 결사항전하고 나중에 협상하는 제3의 방안을 제시한다. 

또한 “먹을 것이 족하면 성(城)도 가히 지킬 것이고 싸움도 가히 이길 것”이라며 쌀도 못 버리게 한다. 이에 성종도 조정에서 대신들과 이미 결정한 정책을 뒤엎는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으리라. 성종은 “누가 적진에 들어가 세치 혀(三寸舌)로 적군을 물리쳐 만세의 공을 세우겠느냐”고 묻는다. 대신 중에 응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희만이 강화회담에 홀로 나서기를 자청한다.

 

서희의 회담 상대는 동아시아 군사대국의 백전노장 소손녕이었다. 소손녕은 “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고려 사신은 절하라”고 윽박지른다. 기선제압이었다. 서희는 양국의 대신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리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응수한다. 두 사람은 두세 번 기 싸움을 되풀이한다. 그러다 서희는 아예 숙소에 들어가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손녕이 대등한 의전 절차에 동의하자 서희는 그때야 담판에 들어갔다. 

소손녕의 요구 사항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너희는 신라를 계승했으니 옛 고구려의 영토는 거란에 속하므로 돌려줄 것. 둘째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事大)할 것. 서희는 소손녕의 전략을 간파했다. 사태를 보는 눈은 예리했고 머리는 냉철했다. 

서희는 국호가 고려이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도읍으로 정한 이유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그 명백한 증거라고 반박한다. 또한 여진이 가로막는 압록강 주변의 땅을 고려에 주어야만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의 사대의 길을 열 수 있다고 협상안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서희는 소손녕에게 거란이 영토를 양보하면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역제안한 것이다. 

거란에 사대라는 명분을 주고 고려는 영토라는 실리를 챙기는 고도의 전략이다. 외교의 기준은 국익이다. 결국 거란은 서희의 설득력 있는 논리에 강동 6주를 내준다. 칼과 총으로 싸우지 않고 세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한 쾌거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민족이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외교라고 가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대도수의 승리와 서희의 굴복하지 않는 의기가 없었더라면 화친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적의 끝없는 요구를 채우느라 갖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라는 안정복의 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방력은 외교, 경제 등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원천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주변 강대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전략적 요충지이다. 서희가 활동했던 10세기도 마찬가지다. 땅은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또한 변하지 않는다. 여기에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주변 강대국이 존속하고 강대국 간의 갈등과 첨예한 이해관계가 존속하는 한 역사는 되풀이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가안보는 엄중하다. 강대국의 패권경쟁은 여전하다. 이런 동아시아 안보구조 속에서 남북분단의 비정상적인 구조를 타개하고 평화질서를 재구축하려면 서희의 탁월한 외교적 안목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강대국은 힘으로 존재하지만 약소국은 지혜가 있어야 생존한다. 국제질서는 생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거란이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역사적 사례이자 설득력 있는 논리 개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서희는 이천(利川) 사람이다. 이천시는 출중한 외교역량과 사명감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창출했던 서희의 정신과 얼을 기리는 서희 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9월 8일과 9일 양 이틀간에 걸쳐 열릴 예정이다. 서희가 21세기 우리에게 준 외교적 유산은 무엇인가.

 

권행완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편집위원장(정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