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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4. 여주에 잠든 세종의 의미

백성들 정신적 지주 영릉… ‘세종의 DNA’ 여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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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매년 세종대왕을 위한 제사를 열며 세종대왕의 정신을 이어왔다. 사진은 지난해 ‘세종대왕탄신 620돌 숭모제전’ 진행 모습이다. 여주시청 제공
대왕이 묻혀 있는 여주.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은 여주를 돌아볼 때 꼭 둘러봐야 하는 곳이 됐다. 여주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이기도, 학생들의 필수 견학 장소이기도 하다. 지역의 명소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세종이 여주에 왜 잠들었는지, 세종이 여주에 어떻게 영향을 끼쳐왔는지 살펴본다.

■ 임금이 찾는 고을 여주

세종대왕이 옮겨온 후 여흥이었던 여주는 격이 상승됐다. 이때부터 여주와 세종대왕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세종대왕이 여주에 잠든 순간부터 세종대왕의 정신은 여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에서부터다. 세종 뒤 후대 왕들은 세종대왕릉에 참배하기 위해 여주를 찾았다. 여주는 왕이 찾는 고을이 됐다.

‘임금이 영릉(英陵)에 배알(拜謁)함으로 인하여 여주(驪州)에 거둥하니, 백관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나가서 대가(大駕)를 전송하였다. 광주(廣州)의 율현(栗峴) 냇가에서 주정(晝停)713) 하고, 저녁에는 같은 고을 낙생역(樂生驛) 앞들 파오달(波吾達)에서 머물렀다.’ (성종실록 12권, 성종 2년 10월 8일)

 

‘아, 대행 대왕이 하늘로 떠나신 그 다음달 병술일에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애지(哀旨)를 내려 삼공(三公)·구경(九卿)과 관각(館閣)·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정조실록 1권, 부록 / 정조 대왕 행장)

성종대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 시대로 꼽힌다. 세종대왕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 초 세종의 치세가 성종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정치, 경제, 법, 과학, 문화, 복지 등 세종이 다분야에서 이룩해놓은 업적 덕분이었다. 

정조는 세종대왕과 닮은 점이 있다. 과학을 중시하며 백성을 위하는 애민 정신이 투철한 왕이었다. 그도 여주에 발걸음했다. 조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성종과 정조가 세종대왕릉을 방문해 그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했다는 기록은 의미 있다. 

정조의 ‘영릉(英陵) 국내(局內)에 흙을 채울 때의 고유문(告由文)’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 전알한 날의 윤음’은 정조의 시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려 있다. 세종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정조의 마음을 알 수 있어 유의미하다.

또 정통성 확보와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중종도 영릉에 행차했다

‘모든 거둥에 관한 일을 사초(史草)에는 반드시 다 쓰겠으나, 이번에 능에 참배하는 일은 날마다 전교한 것부터 정승(政丞)에게 수의(收義)하고 정승이 아뢴 일과 해사(該司)가 아뢴 일과 영릉(英陵)에서 제사를 거행한 뒤에 환궁(還宮)할 때까지 한 일을 모두 상세히 써서 아뢰면 또한 이것을 뒷날의 규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중종실록 63권, 중종 23년 9월 13일)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낸 뒤에 경덕궁에서 양로연(養老宴)을 열어야 한다. 전에 영릉(英陵)에 행행하였을 적에는 과천(果川)과 용인(龍仁) 지방에 모두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번에는 개성부와 풍덕(豊德) 지방의 노인은 경덕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장단(長湍)·파주(坡州)·고양(高陽) 지방의 노인은 통제원(通濟院)에서 잔치를 베풀라는 것을 예조에 이르라.’ (중종실록 80권, 중종 30년 8월 7일)

'영릉의 정자각을 봉심하다'가 실려 있는 동명선생집 페이지

중종은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이다. 본인이 직접 주도한 반정이 아니었기에 개혁을 추진하고자 해도 한계가 있었다. 중종이 단순히 참배만을 위해 세종대왕릉을 찾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중종은 영릉에서 행한 제사부터 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상세히 기록해 훗날 왕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주목할 점은 선대 왕릉 행차가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종은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조선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릉에 제사 지낸 뒤 양로연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주 영릉을 방문했을 때 과천과 용인 지방에서 양로연을 베푼 사례를 들었다.

 

양로연은 조선시대 노인을 공경하고 풍습을 바로잡기 위한 잔치다. 특히 세종은 양로연을 열며 80세 이상이면 천민도 참석하게 했다. 이렇듯 백성과 노인을 위하는 세종의 마음은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 신하와 민중의 정신적 지주 된 영릉

영릉은 후대 왕 뿐만 아니라 신하와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많은 신하가 영릉을 오가며 시를 남겼다.

‘여주(驪州) 고을 산 빛이 구의산 흡사하니

/ 黃驪山色九疑同

두 분 성군 의관이 여기 이곳 묻혔어라

/ 二聖衣冠葬此中

고개 돌려 바라볼 제 고금의 한 아련하여

/ 回首冥冥今古恨

저무는 강 동녘에서 봄바람에 노 멈추네

/ 春風輟棹暮江東’ (‘왕릉을 바라보며’, 김창협)

‘일만 산이 구의산을 향하여서 조아리니

/ 萬山朝拱九峯疑

신성한 분 천년토록 길이길이 생각누나

/ 神聖千秋永孝思

솔과 잣은 울창하여 하얀 학이 둥지 틀고

/ 松柏晝陰巢白鶴

앵두 복숭 봄에 익어 누런 꾀꼴 울어 대네

/ 櫻桃春熟黃

원로들이 갱가 부른 중화 임금 날인 데다

/ 歌元老重華日

사신들이 시를 짓는 한 무제의 시절이네

/ 作賦詞臣武帝時

활과 칼은 몇 차례나 가는 세월 겪었는가

/ 弓劍幾回經歲月

텅 빈 전각 바라보매 슬픔 금치 못하겠네

/ 却瞻虛殿不堪悲’ (‘영릉의 정자각을 봉심하다’, 정두경)

위 시들은 조선 후기 문신들이 지은 시다. 세종대왕이 승하한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여주 왕릉을 지나며 쓴 시다. 세종대왕을 떠올리며 드는 소회를 담은 내용이다. 조선 선비들은 주자학을 충실히 따른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본받고자 했다. 선비들은 여주를 찾아 이런 마음을 시와 글 등 작품에 담았다.

 

이와 동시에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여주의 자연을 노래했다. 왕릉을 품고 있는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드러난다. 두 시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구의산’은 중국의 최고 임금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순(舜) 임금이 묻힌 산이다. 김창협과 정두경은 세종대왕이 잠든 여주를 구의산에 빗대 표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릉에 대한 다른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경기도순찰사로 왜적과 싸운 ‘성영’의 이야기다. 그는 임진왜란 때 어려움 속에서 군사를 모집하던 중 영릉 앞에서 각오를 다졌다. 

실록에는 그가 왕 앞에서 “영릉(英陵)을 배알(拜謁)하고 통곡하며 네 번 절하고 물러왔는데, 그것은 당시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朝廷)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가끔 무리한 말들을 많이 하므로 군대를 이끌고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배알하여 대중의 뜻을 통일시키고 대의(大義)를 밝히려 하였던 것이다”라고 밝혔다고 적혀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성영은 이런 자신의 행동이 예에 어긋나는 망령된 것이라며 파직을 청했지만 왕은 이를 물리쳤다. 선조가 성영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할 수 있다.

 

■ 여주, 매년 세종대왕릉에서 제사 지내며 정통성 확보…활용 가능한 콘텐츠도 풍부

여주 세종대왕릉에서는 매년 제사가 열린다. 지난해 세종대왕탄신 620돌 숭모제전을 치렀다. 여주가 가지고온 정통성은 현대 활용할 수 있는 문화·역사 콘텐츠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여주시는 지난 2015년부터 ‘세종인문도시’를 표방해 세종대왕과 관련한 여러 행사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주를 이야기할 때 세종대왕을 빼놓을 수 없다. 세종대왕을 이야기할 때도 여주를 빼놓을 수 없다. 영릉이 여주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랜시간 세종의 정신이 여주를 기점으로 전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류진동 손의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