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도박 사이트

[세종 즉위 600돌_대왕의 꿈이 깨어난다] 2. 사람에 뿌리둔 정책 펼친 세종대왕

노비에 출산 휴가… 사회적약자 보살핀 복지정책 선구자

카지노 도박 사이트

▲ 여주시 홍문동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세종대왕의 업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주시 제공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다. 올해 세종대왕을 조명하는 행사와 사업이 다수 진행될 예정이다.

 

즉위 600주년이 아니라도 세종대왕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주목받는 역사 인물 중 한명이다.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 책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근래에는 위인으로서 세종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조명한 작품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 2008년 방영한 KBS드라마 <대왕세종>은 대군 시절 ‘이도’라는 한 인물이 왕으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집중했다. 2011년 방영한 SBS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도 무겁고 진지한 위인의 모습이 아니라 고민하고 갈등하며 신하에게 욕하기도 하는 세종의 모습을 상상했다. 

두 작품은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대중의 공감과 호평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민본주의와 인문정신에 기반을 둔 세종의 다른 정책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남성 중심 유교 사회…여성을 하찮게 여기지 않은 세종

세종대왕이 펼친 ‘환과고독(鰥寡孤獨)’ 정책은 여성과 노인, 고아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남성 중심의 유교 국가인 조선이었지만 세종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살뜰히 살피고자 했다.

 

지금 봐도 획기적인 ‘출산휴가 제도’는 심지어 천민 계층인 여자 노비에게도 적용됐다.

“옛적에 관가의 노비에 대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는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 이후에 복무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이를 버려두고 복무하면 어린 아이가 해롭게 될까봐 염려한 것이다. 일찍 100일간의 휴가를 더 주게 하였다. 그러나 산기에 임박하여 복무하였다가 몸이 지치면 곧 미처 집에까지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다. 만일 산기에 임하여 1개월간의 복무를 면제하여 주면 어떻겠는가. 가령 그가 속인다 할지라도 1개월까지야 넘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이에 대한 법을 제정하게 하라.” (조선실록,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 10월 19일)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세종은 이를 제도화했다. 남편 노비에게는 부인을 돌볼 수 있는 간호휴가 한달을 주기도 했다.

또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정책을 펼쳤다. 세종대왕의 아버지인 태종 때에도 ‘의녀제도’는 서울인 한양에만 있었다. 세종은 이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여성들은 병을 앓고 있어도 남자 의사에게 신체를 보이는 것을 꺼렸다. 내외하던 풍습때문이었다. 그래서 병이 악화되고 죽는 일이 잦아지자 세종은 전국 관아의 노비 중 젊고 영리한 아이들을 제생원에서 교육시켜 지방에 다시 보내도록 했다.

▲ 관노비 출산휴가는 당시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세종실록 50권 원본 이미지

각별히 친했던 누나인 경안공주가 출산 중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자 의관인 노중례에게 지시해 <태산요록>을 편찬해 보급하기도 했다. 노중례는 여러 의서를 참고해 임신과 분만, 출산 전·후, 어린이 치료와 간호 등 부녀자에게 필요한 의학 지식을 수록했다.

 

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어느 여자 양민 약노의 사례를 크게 받아들여 형벌에 대한 기준을 정해 제도화했다. 이 양민 약노는 주문을 외워 사람을 죽인 혐의로 투옥됐는데 살펴본 결과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한 결과였다. 세종은 여노비의 사례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재조사를 실시해 조치했다.

 

여진족을 토벌한 당시에도 포로인 여진족 여성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고, 이들과 남자들이 다른 공간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대우로 인해 주변 여진과 일본, 중국의 사람들이 조선 백성으로 살고 싶다며 집단귀화한 일도 있었다.

 

■ 장애인 복지에도 힘쓴 성군

조선 전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후기에 비해 비교적 차별받지 않고 살았다. 세종 또한 당시 장애인을 위한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독질(篤疾) 이 있는 사람으로서 아들 하나가 있는 사람은, 나이 비록 70세가 되지 않았더라도 또한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그 중에 90세 이상이 된 사람은 그 집의 부역을 면제해 주니, 그것이 양로(養老)의 의리에는 극진하지 못한 것 같다.

부모가 나이 70세 이상이 된 사람과 독질이 있는 사람은 비록 나이 70세가 차지 않더라도 시정(侍丁)한 사람을 주고, 만약 여러 아들이 먼저 죽었으면 여러 손자 가운데서 시정 한 사람을 주고…” (조선실록,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8월 29일)

 

시정은 ‘나이 많은 어버이를 보양(補養)함으로써 국역을 면제받은 사람’이다. 세종은 장애가 있거나 병이 위독한 사람의 아들이 부모를 돌볼 수 있도록 국역을 면제해줬다. 아들이 먼저 죽으면 손자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범위를 넓히는 등 각 백성의 사정에 맞게 조율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최초로 시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기술교육을 시행했다.

 

“명과학(命課學)을 하는 장님을 나이 젊고 영리한 자 10인을 골라서 서운관(書雲觀)에 소속시키고, 훈도(訓導) 네댓 사람을 두고 사흘마다 한 번씩 모여서 그 업(業)을 익히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3월 5일)

 

조선 시대 시각 장애인의 많은 수가 점술가로 일했다. 세종 때는 운을 점치는 학문에 대해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교육시켰다. 두각을 보이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박연이 맹인 악사의 어려운 생활을 알리자 세종은 맹인 악사에게 일 년에 두 번 주던 돈을 네번으로 늘려 지급하기도 했다.

 

혼자 사는 여자 맹인(盲人) 29명이 북치며 “나라 곡식을 꿔 먹었지만 가난한 탓으로 갚지 못하니 닥나무로 만든 종이로 대신 바치겠다”고 호소하자 세종이 흔쾌히 호조에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한 기록이 남아있다.

세종이 왕자 시절 독서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세종대왕박물관 제공

■ 민본·인문 정신 바탕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綬)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조선실록,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3일)

 

세종대왕은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라는 말을 가장 잘 실천한 군주다. 훈민정음 창제, 측우기·해시계·농사법 보급 등 과학 기술 발전, 군사를 튼튼히 한 업적뿐만 아니라 백성의 삶을 살뜰히 챙긴 세심한 정책이 돋보인다.

 

세종은 여성과 장애인, 노인 등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을 폈지만 매번 수월하게 진행되진 못했다. 때때로 신하들의 반발이 거센 탓이었다.

 

출산휴가를 시행할 당시에도 신하들은 사대부에게 없는 출산휴가를 하찮은 노비에게 주냐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를 물리치며 제도화했다. 사대부에게는 부인을 보살펴 줄 가족이 있지만 노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이유였다.

 

또 시각장애인 점복사(점치는 사람)인 지화에게 종3품 벼슬을 내릴 때도 신하들의 파면 요구가 있었다. 이 또한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은 높은 위치에 있지만 낮은 곳을 바라보며 굽어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격적인 정책은 세종의 굳은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 굳은 의지는 백성이 중심이고 사람이 먼저라는 민본·인문 정신에서 나왔다. 

류진동 손의연기자

 

[인터뷰] 조성문 여주세종문화재단 상임이사

“세종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한 군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세종. 그의 정책은 당시 파격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정책 추진 과정에 대해 세종대왕을 연구해온 조성문 여주세종문화재단 상임이사에게 들어봤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 정책들이다. 세종대왕이 사람중심 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유교를 숭상했던 국가는 기본적으로 공자나 맹자 사상을 이어받는다. 정통 유학사상을 보면 그 나라의 주인을 백성으로 본다. 세종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한 군주다. 그 가르침에 충실했다. 세종은 다른 군주와 다르게 굉장히 백성 친화적인 일들을 펼쳤다.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튼튼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백성 사랑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전제군주 시대 민주, 평등, 국민, 개인에 대한 개념이 없던 때 근본적으로 사람차별에 대해 남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천민을 보고도 하늘 천(天)을 쓰는, 하늘이 내려준 천민이라고 정의했다. 백성이 자기와 똑같은 위치에 있는 인간, 사람이라는 것에 방점을 두고 32년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차별에 대한 생각이 다른 왕들과 다른 것 같다.

세종이 최초로 노인을 위한 양로연을 개최했다. 한양성에 80세 이상 노인을 모이라고 했다. 이때 신하들이 반대했다. 80세 이상 노인 중에서는 벼슬을 내려놓은 양반이 많은데 양반과 천민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임금의 잔칫상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세종이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양로연을 베푸는 이유는 저들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이듦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천민도 전부 참석하게 했다.

 

-당시 반발이 있었을 텐데 세종이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한 의지도 있고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했다. 다방면을 통해 정책을 수립했다. 옳은지 그른지를 가렸다. 집현전에서 젊은 학자들이 옛날 법 등 고전에서 근거를 찾도록 했다. 또 한시적으로 상종서를 뒀다. 중대사가 있을 때 벼슬을 그만둔 노인 등 원로들이 검토하게 하는 거다. 집현전과 상종서를 두고 현재 관리들이 하는 것을 검토하며 좋은 답안을 얻어냈다. 이때문에 권위로 신하들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세하게 알게 했다.

 

-이런 정책들은 백성의 삶에 어떻게 다가왔나.

세종은 의논해가며 정책을 만들었다. 공법 개혁만 봐도 세종의 정책 추진 과정을 볼 수 있다. 공법 개혁은 세종 때 시작해 성종 때 완성했다. 오랜 기간이 걸린 이유가 있다. 당시 조선 인구가 300만 명 정도인데 17만 5천 명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중 과반수가 찬성했음에도 세종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누구나 소외받지 않는 정책을 펴 백성들의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됐다.

류진동, 손의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