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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관 칼럼] 독립전쟁 뒷바라지하며 가족 지켜낸 항일 가문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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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전후해서 새삼 세상이 변했음을 조금은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항일 가문은 3대가 고생하고 친일 가문은 5대가 잘 산다는 대한민국의 슬픈 저간의 역사를 광복절에 대통령이 언급했다. 광복 72년이 지난 오늘에야 대통령이 그간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민족이 광복되었지만 진정으로 광복된 사람들은 친일파였다. 친일파들은 주인이었던 일제가 물러가자 온전히 대한민국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독립전쟁에 생명과 재산을 바치고 가족까지 희생한 분들과 그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학교에서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독립전쟁을 폄하하고 호도해 왔다. 그러니 현충원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묘역에서 영면하고 계신 분들 이름을 보고도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수많은 항일 투사 중에서도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78~1932),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분들은 불멸의 순국선열들이다. 모두 만주에서 독립전쟁의 초석을 마련하고 실제 독립전쟁을 지도한 대부들이다. 광복 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다면 국부로 추앙받았을 분들이다. 

이분들의 뒤에는 생계를 마련하고 가족을 지켜낸 여성들이 있었다. 이 여성들의 참담한 희생과 인내가 없었다면 불멸의 공적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성들의 사연을 잘 모른다. 다행히 세 분 가문의 여성들이 회고록을 남겨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許銀 1907~1997) 여사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李恩淑 1889~1981) 여사는 <서간도 시종기>를, 김동삼 선생의 자부 이해동(李海東 1904~2003) 여사는 <만주생활 77년, 난중록>을 남겼다. 허은 여사는 16세에 시집간 첫날부터 살림을 책임지고 시조부인 이상룡 선생을 따라 셀 수 없이 이사를 다니면서 가족을 건사했다.

이은숙 여사는 조선 최고 명문가 며느리였고 고종황제 질녀 조계진 여사의 시어머니였지만 창기들 삯바느질로 남편 생활비와 활동비를 보태는 지경이었다. 이해동 여사는 평생 시아버지를 세 번밖에 보지 못했지만 큰 며느리로서 가족을 지켜냈고 1989년에야 환국했다. 모두들 여러 이유로 자식을 앞세우는 슬픔을 맛보았다.

 

세 분 여성의 친정도 명문가였다. 허은 여사는 13도연합의병창의군 군사장으로 1907년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선생 사촌의 손녀였다. 이은숙 여사 역시 친가와 외가가 모두 독립투쟁에 나섰다. 이해동 여사는 조선조 말 영남의 거유로 나라가 망하자 순절한 이만도 선생 집안이었고 아버지 역시 항일투사 이원일이다.

 

이분들의 책은 맨 정신으로 읽어내기가 어렵다. 이분들이 이겨낸 고난과 불행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독립투쟁하는 남성들의 헌신과 열정에 대한 존경심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어찌 한이 없었겠는가마는 자신들의 삶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어른들을 잘 모시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항일투쟁에 나서고 감옥에 갇힌 시아버지와 남편과 자식들을 음지에서 뒷바라지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숙명이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었고 인간 승리의 바탕이었다.

 

항일투사를 내조한 여성들 삶도 항일투쟁이다. 항일투쟁이 남편만의 투쟁일 수는 없다. 지금까지 여성들의 항일투쟁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적극 재조명해서 헌창할 때다. 특히, 위 세 분의 자서전이 우리 아이들이 자라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각급 학교와 마을 도서관에 이 책들이 비치될 수 있도록 관계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해본다.

 

허성관 前 행정자치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