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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 신부의 희망세상] 의인의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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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소위 오럴테스트(oral test), 곧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 때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다.

“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이미 몇 사람의 생명이 희생당했고 분위기는 점점 위험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자를 쏘겠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 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되어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나는 ‘정당방위론’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의도가 ‘불가피한 우선선택의 원리’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탄을 발사한 안중근! 일제 강점기 때 한 가톨릭교회의 선교사 출신 주교는 그를 단순한 살인범으로 치부한 적이 있다. 그 오류를 치유하는 과정은 가톨릭교회가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 기념일이다. 우리는 그를 의사(義士)라 부른다. 그는 그 이름에 걸맞게 대의(大義)를 구했던 큰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의로움의 진면목은 어떤 것인가? 과연 큰 의로움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서슬 퍼런 눈빛에 입술을 굳게 다문 근엄? 아니면 의분에 찬 콧김에 호통을 뿜어낼 듯한 아우라?

1908년 봄 안중근 의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두성을 총독으로,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의병 부대를 조직하고 자신은 참모 중장이 되어 일제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면서 일정한 전과를 거두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교전 과정에서 잡은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석방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단 한 명의 일본군이라도 더 죽이는 게 국익에 더 유리했을 것 같겠지만 안중근 의사는 달랐다.

“만국공법(국제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하고는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

안중근 의사는 ‘의’가 무엇인지 알았던 대범한 인물이었다. 그의 ‘의로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정신이다. 그는 이 정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 히로부미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는 ‘의로움’을 냉정한 응징의 덕으로만 여기기 쉽다. 이런 류(類)의 의인의 곁은 서늘하기만 하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품었던 의로움은 이를 넘어 단 한 생명이라도 섬세하게 보듬을 줄 아는 의로움이었다. 의로움에 생명사랑의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의로움의 민낯이 아닐까.

차동엽 미래사목연구소장•인천가톨릭대 교수